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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구층목탑지(경주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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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지(황룡사 구층목탑지)
경주 황룡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경주 황룡사지(황룡사 구층목탑지)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2
시대 신라



해설문

국문

황룡사 구층목탑은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자장(慈藏)의 건의로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와 신라 장인들이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부터 2년간의 조성 기간을 거쳐 하였다.

탑의 건립에 대해서는 경문왕 12년(872) 탑을 수리하면서 넣었던 금동찰주본기(金銅刹柱本記, 보물 제1870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이 일본, 제2층이 중화, 제3층이 오월(吳越), 제4층이 탁라(托羅), 제5층이 응유(鷹遊), 제6층이 말갈(靺鞨), 제7층이 단국(丹國), 제8층이 여적(女狄), 제9층이 예맥(濊貊)이다.

찰주기에 기록된 목탑의 규모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이하가 183척이라 하여 전체가 225척, 약 80m에 달한다.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 100개를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치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 침입 때 황룡사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1976년부터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목탑의 규모는 한 변의 길이가 약 22m인 정사각형으로 총면적은 약 490㎡다. 계단은 남면에 3개소, 북·동·서면에 각 1개소가 확인되었다. 기단에는 1개의 심초석(心礎石)*과 64개의 초석이 놓여 있어 정면 7칸, 측면 7칸이다.


  • 철반(鐵盤): 쇠로 만든 쟁반, 목탑의 꼭대기의 금속제 머리장식
  • 심초석(心礎石): 탑의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의 기초가 되는 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곳은 황룡사 구층목탑이 서있었던 자리이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승려인 자장(590~658)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졌다.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며 백제 장인 아비지(阿非知)와 신라 장인들이 2년에 걸쳐 조성하여 645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1238년 몽골 침입 때 황룡사 전체가 불타면서 목탑도 함께 소실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목탑의 각 층은 신라를 괴롭히던 이웃나라들을 상징하며, 목탑의 높이는 약 80m에 달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들여 온 사리 100개를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1976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총면적 약 490㎡의 목탑 자리에서는 1개의 심초석(心礎石)과 64개의 초석들을 비롯해 남쪽에 3개소, 나머지 면에 각 1개소의 계단이 확인되었다.

  • 제1층이 일본, 제2층이 중화, 제3층이 오월(吳越), 제4층이 탁라(托羅), 제5층이 응유(鷹遊), 제6층이 말갈(靺鞨), 제7층이 단국(丹國), 제8층이 여적(女狄), 제9층이 예맥(濊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