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진도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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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향교는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지방에 설립한 국가교육기관이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 군강남 건립(현 향현사 부근), 조선 현종 9년(1667)에 이곳으로 옮긴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 20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 그리고 유생들이 수학하던 명륜당과 제관실, 관리실 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쳐들어왔을 때 유림이었던 김희남 선생께서 대성전에 봉안한 5성 20현의 위패를 시봉하고 북산 상굴로 피난하면서 명륜당 기둥에다 ‘천하기무부자도(天下豈無夫子道)’라는 7자를 써붙여 놓았다. 그 뒤 왜병들이 향교에 침입하여 소각하려다가 명륜당 기둥에 붙여져있는 이 7자를 보고 그 글귀에 경탄하고 글귀 옆에 다시 ‘차지역유충열사(此地亦有忠烈士)’라는 글을 써 붙인 다음 스스로 후퇴하였다는 옛 이야기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1438년(세종 20)경에 건립된 지방 국립교육기관이다. 향교는 유학 교육으로 교화된 사회를 만들고자 설립·운영되었다. 1438년 지금의 향현사 부근에 향교를 건립하여 봉향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1475년(성종 6)에 지금의 동외리 동편 오리정 산자락에 남향으로 옮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 위험에 처하자, 김희남 형제 등이 5성10철의 위패만 북산으로 옮겨 임시로 보관해두었다가 평정된 후 환안하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에 진도읍성 남쪽에 새로 건물을 지어 봉안하고, 1667년(현종 8) 현 위치에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묘(文廟)와 명륜당(明倫堂)·재(齋)·기타 부속 건물로 구성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이다. 대성전은 비교적 경사가 심한 지형에 막돌 축대 위에 조영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5성과 송조2현, 동방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인 동재,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교직사로 이용되고 있는 서재가 있다. 향교 내외에는 선정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해마다 봄·가을로 석전대제를 지내고 있다.

문맥요소

  • 전학후묘(前學後廟) – 구조 - 교육공간으로서 강의실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재가 앞에 있고, 제향공간으로 대성전이 북쪽에 위치해있는 구조이다.

1차 수정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이다. 덕행과 학문의 모범을 보인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며, 유교의 경전과 역사, 시나 문장을 짓는 법을 가르쳤다.

진도향교는 1438년(세종 20)에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성내리 향현사 부근에 세웠는데, 그 후 몇 차례 위치를 옮겼으며, 1667년(현종 8) 현재의 위치에 정착하였다. 건물로는 향교 뒤편의 제향공간에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廡), 서무(西廡) 등의 사당이 있고, 앞 쪽의 교육공간에는 유생들의 교육 장소였던 명륜당(明倫堂)과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의 건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진도에 쳐들어오자, 당시의 향교의 책임자 김희남이 성현의 위패를 피신시키면서 명륜당 기둥에 “세상에 어찌 공자의 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天下豈無夫子道)”라고 써붙여 놓았다. 그 뒤 왜병들이 향교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려다 이 글을 보고 경탄하며 그 옆에 “이 나라에도 충성스런 인물이 있구나! (此地亦有忠烈士)”라고 써 붙인 다음 스스로 후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도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 25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향교 내외에는 역대 책임자의 공적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자문의견

  1. 사적, 매장 위원1
    • 진도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 25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 이 내용은 두 번째 단락 끝에 두는 것이 좋을 듯함.
    • 본문 내용 서술은 일반적 내용 - 건축물의 구조와 특징, 기능 - 관련 이야기 – 주변현황이나 현재의 관련내용(제향 또는 활용 등)
  2. 사적, 매장 위원2
    • “설립된” → “설립한”
    • “제향공간에” → “제향 공간에”
    • “교육공간에는” → “교육 공간에는”
    • “당시의 향교의” → “당시 향교의”
    • “피신시키면서” → “안전한 곳으로 옮기면서”
    • “써붙여”와 “써 붙인”이 혼용되었음.
    •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 “제향(祭享)을 거행한다.”
    • “이 나라에도” → “이곳에도”

2차 수정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이다. 덕행과 학문의 모범을 보인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며, 유교의 경전과 역사, 시나 문장을 짓는 법을 가르쳤다.

진도향교는 1438년(세종 20)에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성내리 향현사 부근에 세웠는데, 그 후 몇 차례 위치를 옮겼으며, 1667년(현종 8) 현재의 위치에 정착하였다. 건물로는 향교 뒤편의 제향공간에 대성전과 동무, 서무 등의 사당이 있고, 앞 쪽의 교육공간에는 유생들의 교육 장소였던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 서재 등의 건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진도에 쳐들어오자, 당시 향교의 책임자 김희남이 성현의 위패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면서 명륜당 기둥에 “세상에 어찌 공자의 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天下豈無夫子道)”라고 써 붙여 놓았다. 그 뒤 왜병들이 향교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려다 이 글을 보고 경탄하며 그 옆에 “이 나라에도 충성스런 인물이 있구나! (此地亦有忠烈士)”라고 써 붙인 다음 스스로 후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도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 25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해마다 봄과 가을에 이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향교 내외에는 역대 책임자의 공적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