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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남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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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남문비
동래남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동래남문비
한자 東萊南門碑
주소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지정(등록) 종목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1호
지정(등록)일 1972년 6월 26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동래남문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비는 임진왜란 때 동래 등에서 순국하거나 공을 세운 사람들의 충렬을 기리기 위해 현종 11년(1670) 당시 가장 치열한 싸움터였던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에 세운 것으로 ‘동래 충렬비’라고도 한다.

비문에는 선조 25년(1592) 4월 14일 부산진성 싸움에서 정발 장군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사실, 경상좌병사** 이각이 비겁하게 도망친 일, 이튿날 동래부사 송상현이 왜적에 맞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일, 지원을 온 양산군수 조영규와 동래부 군·관·민이 보인 순국충절의 사실, 비의 건립 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임진왜란과 동래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비는 숙종 35년(1709) 충렬사의 옛터에 별사(別祠)를 세울 당시에는 뜰 가운데에, 영조 12년(1736) 별사를 없앨 때에는 남문 안길의 왼쪽으로 각각 옮겨졌다. 그 뒤 1978년 도로 확장공사 등으로 비의 보존에 어려움이 있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가 오래되어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워지자 박물관에서는 1995년 탁본 자료를 바탕으로 비의 오른쪽에 파손되기 전과 비슷한 모형비를 세웠다.


  • 농주산: 지금의 동래경찰서 자리에 있던 낮은 산 이름
  • 경상좌병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준말로 낙동강 동쪽 경상도 육군의 최고 관직 이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임진왜란 때 순국하거나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1670년에 세운 비석이다. 원래 당시 가장 치열한 싸움터였던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졌다가, 여러 차례 옮긴 끝에 1976년 이곳 부산박물관으로 옮겼다.

현재 비석은 크게 훼손된 상태이며, 몸돌 위에 얹었던 머릿돌은 옆에 따로 놓았다. 오른쪽에는 원래 비석의 모습과 비슷한 형태의 비석을 1995년에 새로 세웠다.

비문은 조선시대의 학자인 송시열(1607-1689)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1606-1672)이 썼다. 비문에는 1592년 부산진성에서 전사한 최고 지휘관 정발(1553-1592),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1551-1592) 등 처절한 전투의 내용과 당시 동래 지역 군사, 관리, 백성들의 충절을 자세히 기록하였고, 비를 건립하게 된 과정도 밝혔다. 비문의 내용은 임진왜란과 동래읍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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