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희의 묘
김익희의묘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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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김익희의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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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0 |
한자 | 金益熙의墓 |
주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가정동 산 8-9 |
지정(등록) 종목 |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 |
지정(등록)일 | 1989년 3월 18일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30,000㎡ |
웹사이트 | 김익희의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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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이곳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익희(金益熙)의 묘이다. 김익희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손자로, 조선 인조 11년(1633)년에 문과에 급제 후에 대사성, 대사헌, 대제학 등의 요직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督戰御使)로 활약하였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효종 7년(1656)에 공주 유성(儒城) 사오재(沙土+烏材)에 조성된 이 묘소는 배위(配位)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석물로는 신도비, 묘비, 문인석, 상석, 망주석 등이 있다. 신도비는 1712년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었고, 김익희의 종손 김진규(金鎭圭)가 비문과 두전(頭篆)을 썼다. 문인석은 조선 후기 문관의 공식 행사 복장인 금관조복(金冠朝服)을 한 모습이다. 망주석은 8각의 기둥 상단에 연꽃 봉오리와 같은 장식을 했고, 받침돌과 기둥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기둥에는 다람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우측은 올라가는 모양이고, 좌측은 내려오는 모양이다. 망주석의 다람쥐 조각 때문에 일부에서는 촛대석이라고도 하는데, 우측의 다람쥐는 촛불을 붙이러 올라가고 좌측의 다람쥐는 촛불을 끄고 내려오는 모습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배위: 남편과 아내가 다 죽었을 때에 그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
- 두전: 비석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글.
※ 사오재: 지명이 맞는지, 사오재에서 ‘재’의 한자가 맞는지 확인 필요.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후기의 문신 김익희(1610-1656)의 묘이다.
김익희는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김장생(1548-1631)의 손자로,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며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가서 항전을 독려하였으며, 1653년에는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사를 지낼 것을 청하여 시행되도록 하였다.
무덤은 부인인 한산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무덤 주변에는 묘비, 상석과 문인석 1쌍, 기둥에 다람쥐가 조각된 망주석 1쌍과 신도비가 있다.
현재 묘비는 신도비와 함께 보존을 위해 창주 사적공원 어귀에 설치한 신도비 묘각에 옮겨져 있다. 신도비는 1712년에 세워졌으며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김진규와 김수증이 글씨를 썼다.
-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척화론자로서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며, 인조를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독전어사(督戰御使 : 전투를 독려하는 관직.)가 되었다. 1653년 부제학으로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 드릴 것을 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655년 대사성ㆍ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대제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