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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서씨,김익겸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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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서씨,김익겸정려
연산서씨,김익겸 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연산서씨,김익겸정려
한자 連山徐氏,金益兼旌閭
주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유성대로1665번길 8-13 (전민동)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2호
지정일 2008년 8월 22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정려3기, 정려각 2동
웹사이트 연산서씨,김익겸 정려,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곳에는 충신 김익겸(金益兼), 열녀 연산 서씨(連山徐氏), 열녀 연일 정씨(延日鄭氏) 등 세 사람의 명정(命旌) 현판을 2개의 정려각에 나누어 봉안하고 있다. 김익겸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손자이자 김반(金槃)의 아들로, 1635년 생원시에 1등, 진사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들어가 항전을 하다가 수호할 수 없게 되자 화약을 터뜨려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다. 열녀 연산 서씨는 김익겸의 어머니로, 아들이 강화도에서 싸우다가 죽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열녀 연일 정씨는 김장생의 현손인 죽천 김진규(竹泉 金鎭圭)에게 출가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이듬해 27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연일 정씨에게는 1752년, 연산 서씨에게는 1759년에 표장(表章)하였다.

2개의 정려각 중 동편에 김익겸의 정려를 봉안하였고, 서편에는 연산 서씨와 연일 정씨의 정려를 함께 봉안하였다. 두 정려각은 앞면 1칸, 옆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조가 거의 유사하다. 정려각 뒤편 언덕에 김익겸과 그의 부친 김반의 묘소가 있다.


  • 표장: 어떤 일에 좋은 성과를 내었거나 훌륭한 행실을 한 데 대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함. 또는 그것에 대하여 명예로운 증서나 메달 따위를 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 중기의 충신 김익겸과 열녀 연산 서씨, 연일 정씨 등 광산 김씨 가문의 세 사람에게 내려진 정려이다.

김익겸은 163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사수하며 항전하다가 자결하였다. 1816년 지역 유생들의 상소로 정려가 내려졌다.

연산 서씨는 김익겸의 어머니로, 피난지 강화도에서 아들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어 뒤따라 자결하였다. 1639년 정려를 받았다.

연일 정씨의 남편은 김익겸의 손자 김진규(1658-1716)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이듬해에 27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1752년 정려를 받았다.

2개의 정려각 중 동쪽에 김익겸의 정려가 봉안되어 있고, 서쪽에 연산 서씨와 연일 정씨의 정려가 봉안되어 있다.

정려각의 오른쪽에는 김반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뒤편은 광산 김씨 가문의 묘역이다.

  • 김진규 : 김만기의 아들. 김만기는 김만중의 형이며, 김익겸의 아들이다.
  • 정려각 건물에 닿기 전 김만중의 충효소설비가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