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계숭절사
창계숭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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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창계숭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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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滄溪崇節祠 |
주소 | 0 |
지정(등록) 종목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 |
지정(등록)일 | 1989년 3월 1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사우 |
시대 | 일제강점기 |
수량/면적 | 1동 |
웹사이트 | 창계숭절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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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창계숭절사는 박심문(朴審問)과 박팽년(朴彭年)을 제사하는 사당으로, 1923년에 건립되었다. 박심문은 문과에 급제한 후 김종서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고, 계유정난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는 세조 즉위 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에 사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이후 1804년에 그의 충절을 기려 신원을 복위하였다. 사육신 중 한 명이었던 박팽년은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던 중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옥사하였다. 이후 숙종 때 신원이 되고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원래 가양동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서 제사하였으나 고종 8년(1871) 서원이 훼철(毁撤)됨에 따라 1923년 이곳에 복원된 사당에 박심문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창계숭절사는 ‘물 맑은 시냇가(창계(滄溪): 유등천)에 세워진 절의를 숭상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창계숭절사는 사우(崇節祠: 숭절사)와 강당(尙義堂: 상의당), 동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둘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1923년에 후손들이 세운 후 1977년에 크게 중수하였다. 1978년에는 숭절사 앞에 강당을 건립했다.
- 훼철: 헐어서 치워 버림.
- 배향: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사당, 서원 등에 모시는 일.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 충신 박심문(1408-1456)과 박팽년(1417-1456)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박심문은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뜻을 함께 하려다가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게 되었으며, 귀국 도중 복위를 계획한 이들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을 먹고 자결하였다. 1804년에 그의 충절을 기리고 신원을 복위하였다.
박팽년은 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일원으로 한글 창제에 기여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대한 이들과 함께 세조(재위 1455-1468)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는 발각되었고, 이들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처형당했다. 성삼문을 비롯하여 이때 처형된 여섯 명의 충신들을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경내 건물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다.
사당은 1923년 박심문의 후손들의 주도로 세워졌고, 1977년 중수되었다. 사당 앞에 있는 강당 건물은 1978년에 세운 것이다.
창계숭절사는 ‘물 맑은 시냇가에 세워진 절의를 숭상하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참고 자료
- 대전광역시 중구문화관광 홈페이지 http://www.djjunggu.go.kr/html/tour/history/history_0303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