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
안동 병산서원 Byeongsanseowon Confucian Academy, Andong |
|
대표명칭 | 안동 병산서원 |
---|---|
영문명칭 | Byeongsanseowon Confucian Academy, Andong |
한자 | 安東 屛山書院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 |
지정(등록) 종목 | 사적 제260호 |
지정(등록)일 | 1978년 3월 31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원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7,251㎡ |
웹사이트 | 안동 병산서원,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기존 국문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선조 8년(1575) 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 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병산서원의 처음 모습이다. 류성룡은 선조 때 도제찰사와 영의정을 지냈던 정치가이며 유학자로, 1607년에 타계한 뒤 1614년에 그를 따르던 제사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이로써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講學)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祭享)공간을 모두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으며, 철종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이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강당과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 있는 것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庫直舍)이고, 입교당의 서쪽 뒤편에 서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열려 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서원을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서원은 선현들을 제사지내고 지방 양반 자제들의 강학(講學)을 장려하던 곳이다. 본래 풍산유씨를 위한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이 있었는데 1572년 유성룡(1542~1607)이 서당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614년 유성룡이 사망한 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이 공간에 모시면서 존덕사(尊德祠)라는 이름의 서원으로 재탄생되었다. 1662년에는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柳袗, 1582~1635)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1863년 철종이 ‘병산(屛山)’이라는 서원의 이름을 내려주었다. 병산은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치듯 아름답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1868년 고종대 서원을 모두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국가의 인정을 받아 철폐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에 보수가 행해져서 입교당은 1921년에, 존덕사는 1937년에 건물을 다시 지었다.
서원에 제향된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한 뒤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추천하여 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란 중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제사공간인 존덕사와 강학공간인 입교당이 대표적인 건물이다. 강학공간을 앞에 두고 제사공간을 뒤에 둔 배치를 하고 있다. 이 외에 휴식 공간인 만대루와 문서와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제기와 제구를 보관하는 전사청, 서원을 관리하던 노복들의 거처공간인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다.
2020년 현재까지 서원에 모셔진 학자들을 위해 매년 3월과 9월 초순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1차 수정
서원은 조선시대에 세워진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재상이자 학자였던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614년에 세운 서원이다. 류성룡은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로, 문과에 급제한 뒤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추천하여 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란 중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류성룡은 풍산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2년 현재 병산서원의 위치로 옮기고 문중 자손들을 위한 교육시설로 사용하였다. 이후 1614년 제자들과 지역의 유림이 서당에 존덕사(尊德祠)를 세우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시면서 서원으로 재탄생하였으며, 1662년에는 류성룡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학문을 계승한 류진(柳袗, 1582~1635)을 추가로 제향하였다. 1863년 철종(1849~1863 재위)이 병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는데, ‘병산’은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치듯 아름답다고 하여 불린 이름이다. 1868년 서원을 모두 철폐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도 국가의 존중을 받아 철폐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경내에는 입교당을 비롯한 강학공간을 앞에 배치하고 존덕사를 비롯한 제향공간을 뒤에 배치하였다. 이 외에 휴식 공간인 만대루와 문서와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제기와 제구를 보관하는 전사청, 서원을 관리하던 노복들의 거처공간인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다. 병산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이름나 있다.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영문
ㄴㅇㄹ니;리ㅏㅇㄹ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유성룡 | 인물 | 유성룡 | 1542~1607 |
유진 | 인물 | 유진 | 1582~1635 |
존덕사 | 장소 | 존덕사 | |
입교당 | 장소 | 입교당 | |
만대루 | 장소 | 만대루 | |
장판각 | 장소 | 장판각 | |
전사청 | 장소 | 전사청 | |
고직사 | 장소 | 고직사 | |
세계문화유산 | 개념 | 세계문화유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