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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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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30일 (목) 01:00 판 (1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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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
귀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귀래정
한자 歸來亭
주소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538-1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
지정(등록)일 1985년 8월 5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조경건축/누정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귀래정,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귀래정은 1456년에 신말주(申末舟, 1429~1503)선생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이다. 신말주는 집현전학사를 지낸 보한재 신숙주의 아우로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마다하고 처가인 순창으로 낙향하여 귀래정을 지어 자연을 벗 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순창에서 살았으며, 충신과 효자 등이 많이 배출되었다. 설씨부인은 순창 강천사의 복원을 위하여 권선문을 지은 뛰어난 여류 문인이었으며, 당대에 교류한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와 강희맹, 김인후 등이 지은 시 등을 적은 편액이 남아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1470년경에 지은 정자이다.

그는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세조의 즉위에 공신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동생이다. 그는 145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 역시 형인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1455년 원종공신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부인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순창에 잠시 머물던 시기에 이 정자를 지었고, 70세에 은퇴한 이후 낙향하여 정자에서 주로 지냈다.

당시 훈구파 관료로서 세조 정권 아래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과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각각 「귀래정기(歸來亭記)」와 「전주부윤 귀래정공 신도비명(全州府尹歸來亭公神道碑銘)」을 지어주었다. 이로 인해 ‘귀래정’이라는 누정명은 그의 호가 되었는데, ‘그 벼슬을 돌려주고 그 직임을 버리고 그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뜻으로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에 의해 형성된 은자로서의 이미지가 신말주에게 부여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1498년까지 부인의 병 치료 기간인 7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관직을 역임하였다.

실제 사실과는 다르지만 귀래정은 신말주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에게 ‘은자’라는 이미지를 부여하였고, 사후에는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절의정신을 되새기는 공간이 되었다.

1차 수정

귀래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가 1470년경에 지은 정자이다.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신말주는 세종(1418~1450 재위)과 세조(1455~1468 재위) 때의 대표적 명신인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막내동생이다. 1454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워 1455년 공신이 되었으며, 1498년 70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1470년부터 1476년까지 약 7년간 부인의 고향인 순창에 머물렀고, 은퇴한 후에도 순창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귀래정이라는 이름은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당시 신말주가 가깝게 교유하였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어주었다. 신말주는 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하였다.

정자의 중앙에는 방을 두었고 사방에 마루를 둘렀다. 내부에는 서거정이 '귀래'라는 이름을 지은 연유를 기록한 「귀래정기(歸來亭記)」와 당대의 문장가였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시문 등이 걸려 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정훈, 「귀래정 신말주 연구」, 『한국언어문학』 92, 한국언어문학회, 2015.
  • 『세조실록』, 『성종실록』
  • 『귀래정 실기』, 귀래정 실기 간행 위원회, 1994.
→ 기존 안내문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신말주에 대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낙향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455년(세조 1) 계유정난의 공으로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1456년(세조 2) 대에는 사간원 정언, 사간원 우정언, 1459년(세조 5) 종사관, 사간원 우헌납, 1461년(세조 7) 예조 정랑, 1464년(세조 10) 사간원 사간, 1466년(세조 12) 사간원 대사간, 형조 참의, 1476년(성종 7) 전주부윤, 1479년(성종 10) 진주목사 이후 창원부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사간원 대사간, 첨지중추부사, 전라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순창에 머문 시간은 부인의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낙향한 1470년(성종 1)부터 다시 기록에 등장한 1476년(성종 7)까지 대략 7년 정도의 기간과 70세가 되어 관직에서 물러난 1498년부터 죽음을 맞이한 1503년까지 6년 정도의 기간이다 .
결론적으로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은 절의의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절의와 은거하는 선비의 이미지는 그와 친분이 있고 세조 정권에 참여하였던 서거정과 강희맹 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서거정은 신말주가 지은 정자인 귀래정에 대해 「귀래정기」를 지어 주었고, 강희맹은 「전주부윤귀래정공신도비명」을 지어 주었는데, 신말주가 세조 즉위 후 낙담하여 낙향하였으나 형인 신숙주의 강권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벼슬을 하였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순창을 그리워하고 은거하려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10대 후손인 신경준은 「유허비명」을 지어 그가 벼슬길에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하였다. 이는 신숙주의 문집이나 연대기 자료에는 볼 수 없는 기록으로 세조 정권 당시 관직에 나아간 신말주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이다.
그러므로 기존 안내문에 있는 신말주에 대한 설명은 재고해야 한다.
→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낙향하여 관직에 오르지 않은 그의 절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정자의 건립 시기를 1456년(세조 2)으로 하였다. 이는 강희맹의 「신도비명」에 나와 있고, 그의 후손인 신영우의 「귀래정 중수사실기」에 나온다. 하지만 1456년 당시 신말주는 조정에서 사간원 우정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창에 정자를 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는 1476년(성종 7)에 정자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그의 후손인 신광한이 찬한 「신공제신도비명」에 나온다. 신말주가 1476년 전주 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전주는 순창과 하루 거리 밖에 되지 않고 전주 부윤 재임 당시 순창에 자주 왕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시기로 보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1470년(성종 1)에 건립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당시 부인의 병 치료 목적으로 순창에 내려와 대략 7년 정도 거주하였고, 서거정의 「귀래정기」에도 이때 건립한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1476년에 전주 부윤으로 부임할 당시 ‘정자’를 언급하였으므로 이미 정자가 지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정자의 건립 시기는 1470년경으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