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재
월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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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월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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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山齋 |
주소 |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용안로 307-16 (모산리)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3호 |
지정(등록)일 | 1984년 2월 29일 |
분류 | 유적건조물/교육문화/교육기관/서당 |
수량/면적 | 일곽 |
웹사이트 | 월산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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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기존 국문
월산재는 영광 김씨들이 중심이 되어 후손들의 교육과 인재양성을 위해 조선 순조 24년(1824)에 지은 건물이다. 사당인 용강자, 강당인 월산재,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창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가장 윗부분에 용강사가 있고 아래로 월산재가 있으며 월산재 앞으로 관리사와 창고가 대칭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종 19년(1882)에 사림들이 지은 용강사는 난옹 김광범 우수 김상범 뇌수당 김성범 죽옹 김정서 학남 김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규모가 큰 편인 월산재는 앞면 6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인데, 현재는 강당으로 쓰인다.
수정 국문
초고
1824년(순조 24) 영광김씨 김몽흠(夢欽)과 김상철(金尙澈)이 문중과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공간이다. 앞에 반달 모양의 산이 있어 월산재(月山齋), 월산정사(月山精舍)라고 했으며, 월내천이 흘러 월내서재라고도 했다.
강학공간인 월산재를 중심으로 뒤편에 문중 사당인 용강사(龍岡祠)가 있다. 서원이나 향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강당 앞 좌우에는 생도들의 거주시설인 재(齋)가 없고 관리사와 창고가 있다. 이는 월산재가 강학과 거주의 기능을 모두 담당했기 때문이다. 월산재는 정면 6칸·측면 3칸으로 좌측 2칸에 대청, 우측 4칸에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1882년(고종 19) 지역의 유림들이 용강사를 세우고 조선 중기 효행과 절의로 이름 높았던 김광범, 김상범, 김성범 삼형제와 김광범의 손자 김정서의 위패를 모셨다. 이후 한말의 우국지사 학남(鶴南) 김우(金玗, 1833~1910)를 추향하였다. 김우는 호남의 명유(名儒)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었으며 그가 월산재에 머물렀을 때에 많은 학자 등이 월산재에 방문하였다.
1차 수정
월산재는 영광김씨 김몽흠(夢欽)과 김상철(金尙澈)이 문중과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824년에 설립한 교육공간이다. 앞에 반달 모양의 산이 있어 월산재(月山齋), 월산정사(月山精舍)라고 했으며, 월내천이 흘러 월내서재라고도 했다.
1882년 지역 유림들이 문중 사당인 용강사(龍岡祠)를 세우고 조선 중기 효행과 절의로 이름 높았던 김광범, 김상범, 김성범 삼형제와 김광범의 손자 김정서의 위패를 모셨으며, 이후 한말의 우국지사 김우(金玗, 1833~1910)를 추가로 모셨다. 김우는 호남의 명유(名儒)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제자였으며, 그가 월산재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학자들이 월산재에 방문하였다.
강학공간인 월산재가 앞에 있고 뒤편에 용강사가 있다. 월산재가 강학과 거주의 기능을 모두 담당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거주시설은 따로 없다. 월산재는 좌측 2칸에 대청, 우측 4칸에 온돌방과 부엌을 두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
- 월산재 연혁 비문(월산재 현장 소재)
- 장흥군 모산리 영광김씨 용강사, 『장흥신문』. http://www.j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9082
- "월산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341360073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