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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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4월 26일 (일) 01: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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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척화비
Anti-appeasement Stele, Changnyeong
창녕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녕 척화비
영문명칭 Anti-appeasement Stele, Changnyeong
한자 昌寧 斥和碑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만옥정공원)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2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창녕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그러한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창녕 척화비는 만옥정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종 3년(1866)에 짓고 고종 8년(1871)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고 하여 강력한 쇄국 의지가 담겨져 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자 일본공사가 요구하여 척화비 대부분이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창녕을 비롯하여 서울, 부산, 함안, 대구 등지에 실물이 남아 있다.

영문

Anti-appeasement Stele, Changnyeong

This is one of the many anti-appeasement steles set up across the country in 1871.

Following devastating armed conflicts with France in 1866 and with the United States in 1871 on Korean soil, Heungseon Daewongun (1820-1898), prince regent and de facto ruler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reign of King Gojong (r. 1863-1907), ordered to erect these steles to warn people against opening Joseon to Western powers. Each stele bears twelve Chinese characters, reading, “The Western barbarians have invaded. To not fight is to advocate peace. To advocate peace is to sell out the country.” Next to this admonition are small characters which read, “Let this be a warning to our offspring for the next ten thousand years.” Daewongun was kidnapped to China in 1882, losing power. Most of such steles were taken down after his fall at the request of Japan. Over 30 of them survived to this day.

The anti-appeasement stele in Changnyeong is made out of granite. It does not have a base, so its lower part is buried in the ground. It is said that it was originally located in Gyoha-ri Village, but was moved to the current location after independence from Japanese colonial rule (1910-1945).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1871년 전국에 세워졌던 여러 척화비 중 하나이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부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른 뒤,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척화비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의 열두 글자를 크게 새겼고,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는 내용이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러한 척화비는 1882년 이하응이 실각한 후 일본 공사의 요구로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현재는 전국에 약 30여 기의 척화비가 남아있다.

창녕의 척화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받침돌이 따로 없고 비의 아랫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다. 원래 창녕 교하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광복 이후에 이곳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