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괴헌고택
영주 괴헌고택 Goeheon House, Yeongj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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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영주 괴헌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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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Goeheon House, Yeongju |
한자 | 榮州 槐軒古宅 |
주소 |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381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민속문화재 제262호 |
지정(등록)일 | 2009년 10월 3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5필지/2,030㎡ |
웹사이트 | 영주 괴헌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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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영주 괴헌 고택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경집이 정조 3년(1779)에 외풍을 막아 주고 낙엽 등이 모여 잘 산다는 ‘소쿠리형’ 명당에 지은 살림집이다. 아들 김영이 분가할 때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김영은 회화나무가 가득하다는 뜻에서 집의 이름을 괴헌으로 짓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후 고종 8년(1871)에 손자 김복연이 집 일부를 고쳤는데, 이때 사랑채를 지금처럼 확장하였다고 추정된다. 1972년 수해로 본채 앞의 왼쪽과 오른쪽에 있던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의 정자인 월은정(月隱亭)과 8칸 크기의 행랑채가 붕괴되어 사라졌다. 월은정의 현판은 사랑채 처마 밑에 달려 있다.
괴헌 고택은 대문채,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 안주인이 생활하는 안채, 조상의 위패인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 방앗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방앗간채만 초가지붕이고 나머지는 기와지붕의 건물이다. 대문채를 지나면 왼쪽에 방앗간채가 있고, 정면에 사랑채와 안채가 있다. 사당은 안채 오른쪽 뒤편의 높은 곳에 따로 배치하였다.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본채는 평면 ‘ㅁ’ 자 모양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인 중문 곁에 집채인 중문간채를 두었는데, 수납과 완충의 역할을 한다. 안채는 방을 앞뒤 2열로 배치한 겹집으로 앞면 6칸, 옆면 2칸 규모인데, 왼쪽 뒤편에 있는 부엌과 안방 뒤쪽으로 2칸을 더 붙여 3열로 만들었다. 사랑채는 중문 오른쪽에 ‘ㄱ’ 자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앞면 3칸, 옆면 4칸 반의 크기인데, 후대에 확장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옥과는 다른 독특한 배치를 보인다.
괴헌 고택은 생활의 편의를 위해 쪽마루와 많은 수납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쾌적한 실내 환경을 위한 작은 환기창을 여러 개 설치하였다. 이는 생활의 편의를 위해 여러 시설이 발달한 조선 후기 살림집의 구조를 잘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이한 것은 안방에 만든 피난 다락과 사랑방 다락 뒷벽에 만든 은신처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위험을 대비해 만든 시설로 추정되는데, 이는 시대상을 알려 주는 희소한 자료이다. 이 외에도 성주 단지*가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전하고 있다. 원래 두월리 내성천 주변에 있었으나, 영주댐 건설로 현재 위치로 옮겼다.
- 성주 단지: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며 성주신의 신체(神體)를 모셔 두는 단지. 쌀이나 돈 따위를 넣어 둔다.
영문
Goeheon House, Yeongju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1779년 김경집(1715-1794)이 분가하는 아들 김영(1765-1840)을 위해 지어주었다. 두월리 내성천 주변에 있었으나, 영주댐 건설로 현재 위치로 옮겼다. 원래 집이 있던 곳은 풍수지리상 소쿠리형으로 해석되는데, 좋은 기운이 모여 잘살게 된다는 명당으로 여겨졌다. 집 주변에 회화나무가 많아서, ‘회화나무가 가득한 집’이라는 뜻의 ‘괴헌’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괴헌고택은 현재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 방앗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1871년 김경집의 손자 김복연이 집 일부를 고치면서 확장했다고 한다. 사랑채와 안채는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원래는 사랑채 앞에 월은정이라는 정자와 행랑채가 있었으나, 1972년 수해로 붕괴되었다. 사랑채 처마 밑에는 월은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안채 뒤편, 이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따로 배치하였다.
안채에는 성주신을 상징하는 단지가 놓여있다. 성주신은 한국의 가정신앙에서 제일 높은 최고신으로, 가내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단지에 쌀이나 돈 등을 넣어두고 성주신으로 받들며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또한 이 집은 쪽마루와 수납공간을 많이 만들었으며, 작은 환기창을 여러 개 설치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살림집이 생활의 편의를 위해 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안방에는 다락이 있고, 사랑방 다락 뒷벽에도 작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들은 일제강점기에 위험을 피해 숨을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