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척화비
창녕 척화비 Anti-appeasement Stele, Changny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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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창녕 척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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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Anti-appeasement Stele, Changnyeong |
한자 | 昌寧 斥和碑 |
주소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만옥정공원)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8호 |
지정(등록)일 | 1995년 5월 2일 |
분류 |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창녕 척화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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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척화비란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르면서 그러한 의지를 더욱 굳혀 국민들에게 서양세력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경고하고자 서울 및 전국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창녕 척화비는 만옥정 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종 3년(1866)에 짓고 고종 8년(1871)에 세워졌다. 비문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고 하여 강력한 쇄국 의지가 담겨져 있다.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자 일본공사가 요구하여 척화비 대부분이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창녕을 비롯하여 서울, 부산, 함안, 대구 등지에 실물이 남아 있다.
영문
Anti-appeasement Stele, Changnyeong
영문 해설 내용
척화비는 서양 세력과 화합할 수 없다는 내용을 새겨 1871년에 세운 비석이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부이자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을 치르면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을 비석에 새겨 전국 각지에 세웠다. 이러한 척화비는 1882년 이하응이 실각한 후 일본 공사의 요구로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현재는 전국에 약 30여 기의 척화비가 남아있다.
창녕의 척화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받침돌이 따로 없고 비의 아래 부분이 땅 속에 묻혀있다. 원래 창녕 교하리에 있었다고 하는데, 1945년 이후에 이곳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