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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사제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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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사제 신도비
창녕 성사제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녕 성사제 신도비
한자 昌寧 成思齊 神道碑
주소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 729-5
지정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
지정일 1983년 8월 6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95㎡
웹사이트 창녕 성사제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위관료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창녕 성사제 신도비는 고려 말의 충신인 성사제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성사제는 공양왕 때 보문각 직제학의 벼슬을 지내었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한탄하며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특히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원래 두문동은 경기도 광덕산 서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지역이나 고려말 72명의 신하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거부하고 숨어지내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비문은 김굉이 지었으며 전액*은 김노경이, 글씨는 이노준이 썼다. 이 비는 원래 창녕읍 조산리에 있었으나 1930년대 대지면 모산리로 옮겼다가 2002년 현재의 위치인 대지면 석리로 이건하였다. 비석의 글씨는 얕게 새겨져 외면이 많이 닳아 판독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 전액 : 전자체로 비석의 윗부분이나 머릿돌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고려 말의 충신 성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성사제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벼슬을 사양하고 고려의 다른 충신들과 함께 고려의 도읍이 있던 개경의 어느 골짜기에 은둔하였다.

그는 부인과 아들을 고향인 창녕으로 돌아가게 했고, 이후 이 지역에 세거하게 된 그의 후손들이 1812년 창녕읍 조산리에 있는 성사제 부인의 묘 옆에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몸돌에 새겨진 글씨는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렵다.

비문은 1809년에 김굉(1739~1816)이 지었다. 비석 윗부분의 제목은 김노경(1766~1837)이, 글씨는 이노준이 썼다.

비석은 1930년대 대지면 모산리로 옮겨졌다가 200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 안에 있다. / 후손들이 그의 충절에 보답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