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 석탑
정지석탑 |
|
대표명칭 | 정지석탑 |
---|---|
한자 | 鄭池石塔 |
주소 |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8번지 |
지정(등록) 종목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2호 |
지정(등록)일 | 1983년 7월 20일 |
분류 | 유적건조물/종교신앙/불교/탑 |
수량/면적 | 1기 |
웹사이트 | 정지 석탑,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
해설문
기존 국문
남해를 구해준 정지장군(1347~1391)을 위해 남해 지역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손수 돌을 깎고 다듬어서 세운 석탑이다. 정지장군은 최영,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조정의 부패로 혼란에 극심했던 시기에 남해안을 침략한 왜구를 무찌르는데 큰 활약을 했다.
탑은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가 2.25m로 소박하지만 엄숙한 분위기를느끼게 한다. 탑신 받침은 자연석의 큰 바위로 이루어 졌다. 이락사, 충렬사와 함께 남해가 나라의 백성을 구한 애국정신에 곳곳에 배어있는 호국의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서 있다. 정지석탑이 있음으로 현재까지 마을 이름을 탑동으로 부르며 지금도 마을 주변들에 의해 잘 보존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석탑은 1383년(고려 우왕 9) 정지(鄭池, 1347~1391)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남해 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은 것이다.
정지는 고려 말기의 무장이다. 왜구와의 전장을 누비며 그들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석방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사망하였다.
이 석탑은 커다란 바위를 받침 삼아 그 위에 몸돌을 올렸다. 몸돌부는 사각형 4개, 조그만 원형 1개의 몸돌과 지붕돌 5개로 번갈아 층층이 쌓아 올렸다. 소박한 모습의 탑으로, 왜구로부터 남해지방과 백성들을 구한 애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차 수정
이 석탑은 1383년 정지(鄭池, 1347~1391) 장군이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다. 남해 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어서 세웠다고 한다.
정지는 고려 말기의 무장이다. 전장을 누비며 왜구를 섬멸하는 공을 세웠고,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무고한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고, 석방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사망하였다.
이 석탑은 커다란 바위를 받침 삼아 그 위에 몸돌을 올렸다. 몸돌부는 사각형 4개, 조그만 원형 1개의 몸돌과 지붕돌 5개로 번갈아 층층이 쌓아 올렸다. 소박한 모습이지만 남해지방과 백성들을 구한 애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맥요소
Nodes
ID | Class | Label | Description |
---|---|---|---|
정지석탑(鄭池石塔) | 문화유산 | 정지석탑(鄭池石塔) | |
정지(鄭池) | 인물 | 정지(鄭池) | 1347~1391 |
이성계(李成桂) | 인물 | 이성계(李成桂) | 1335~1408 |
위화도 회군 | 사건 | 위화도 회군 | |
회군공신 | 개념 | 회군공신 |
Links
Source | Target | Relation |
---|---|---|
정지석탑(鄭池石塔) | 정지(鄭池) | ~와 관계가 있다. |
이성계 | 정지 | ~와 관계가 있다. |
정지 | 위화도 회군 | ~에 참여했다. |
정지 | 회군공신 | ~와 관계가 있다. |
갤러리
참고자료
- 정지석탑(鄭池石塔), 문화유적조사서.
- 정지석탑(鄭池石塔), 지정문화재대장.
- 정지석탑(鄭池石塔),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5_1_1_0&ccbaCpno=3413800420000#
- 정지(鄭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9%84%AD%E5%9C%B0&ridx=0&tot=1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