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창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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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창 묘
Tomb of Yi Geon-chang
대표명칭 이건창 묘
영문명칭 Tomb of Yi Geon-chang
한자 李建昌 墓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65-1
지정(등록) 종목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지정(등록)일 1995.03.02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소유자 이익상
시대 조선
수량/면적 1기 / 241.5㎡



해설문

국문

조선 후기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이건창은 병인양요 때 순국한 충정공 이시원의 손자로 1852년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영재,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으로 1867년 15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23세에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름을 떨쳤고, 24세에 충정우도 암행어사를 거쳐 예문제학, 함흥부의 안무사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31년(1894) 갑오개혁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여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재야에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1898년 6월 18일 47세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묻혔다. 저서로는 『명미당집』, 『당의통략』, 『독역수기』 등이 있다.

영문

This is the tomb of Yi Geon-chang (1852-1898), a civil official and great writer of the late Joseon period. He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at the age of 15 in 1867 and distinguished himself when he followed the state envoy to Qing China in 1874 as a document officer. He was appointed as a secret inspector several times and was dispatched to Chungcheong-do and Gyeonggi-do Provinces. In 1894, when a series of sweeping reforms were implemented which encouraged modernization of the Joseon dynasty, he opposed it and retired to his hometown in Ganghwa.

His tomb does not have any decorative structures.

In the nearby Hwado-myeon is Yi's birthplace (Incheon Monument No. 30), which was restored in 1996.

영문 해설 내용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문장가였던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이건창은 1867년 1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으며, 1874년에는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는 기록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여러차례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894년 조선의 근대화를 꾀한 일련의 개혁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강화로 돌아왔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 없다.

1996년 이건창의 생가(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가 강화군 화도면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