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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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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k Lionberger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2월 20일 (금) 11:01 판 (Identified Individ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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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묘
Tomb of Yi Seung-hun
"이승훈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이승훈 묘
영문명칭 Tomb of Yi Seung-hun
한자 李承薰 墓
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 132-1
지정(등록) 종목 시도기념물 제63호
지정(등록)일 2011년 12월 28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8,430㎡
웹사이트 "이승훈 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한국 가톨릭 교회의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1756-1801)의 묘이다. 그는 25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 선교사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후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정조 9년(1785) 서울 명동의 김범우 집을 교회로 삼아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 후, 천주교 박해시기에 몇 차례의 배교(背敎)와 복교(復敎)의 과정을 거치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 등 여러 신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후 이곳에 묻혔다. 그의 유해 이장을 위해 1981년 무덤을 열었으나 거의 진토가 되어 있었으며, 수습할 수 있는 유골은 경기도 광주군 천진암 성지로 옮겨졌다. 이곳은 이승훈이 180년 넘게 묻혀 진토(塵土)가 되어있는 진묘(眞墓)이다.

영문

This is the tomb of Yi Seung-hun (baptismal name: Peter, 1756-1801), the first baptized Catholic Korean.

Yi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780 at the age of 25, but he dedicated himself to study instead of pursuing an official career. In 1783, when he joined his father’s diplomatic mission to Beijing, China, he contacted missionaries to learn Christian theology and was baptized by Father Grammont.

After coming back, he had regular, secret meetings with his colleagues for religious studies and worship at a private home in Myeong-dong, Seoul. This gathering is regarded as the first Catholic church in Korean history, and the private home is now the location of Myeongdong Cathedral. However, due to the severe persecution against Catholics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he became a renegade and returned to church several times, until he was executed along with other Catholic followers in 1801.

Although he was originally buried at this site, his body was moved in 1981 to Cheonjinam, a Catholic holy site in Gwangju, Gyeonggi-do. Currently, a tombstone and tomb mound remain. The two tombs below are those of his sons.

영문 해설 내용

한국 가톨릭 교회의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1756-1801)의 묘이다.

1780년 25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선교사들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1785년에는 서울 명동의 한 살림집을 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로 여겨지고 있으며, 당시 이들이 모이던 곳에는 현재 명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이승훈은 몇 차례 배교와 복교의 과정을 거치다가 1801년 여러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승훈의 유해는 이곳에 처음 묻혔으나, 1981년 경기도 광주군의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으로 옮겨졌다. 현재 이곳에는 가묘와 비석이 남아있으며, 아래 두 묘는 이승훈의 아들들의 묘이다.

Semantic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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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Te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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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이승훈 李承薰 Lee Seung-hun
해설 순교 殉敎 religious martyrdom
해설 순교자 殉敎者  martyr
해설 신유박해 辛酉迫害 Catholic Persecution of 1801
해설 to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