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장군 묘
이일장군 묘 Tomb of Yi I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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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이일장군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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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Tomb of Yi Il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매산리 산108-1 |
지정(등록) 종목 | 용인시 향토유적 제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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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이일(李鎰, 1538~1601) 장군은 조선 선조 때 무신으로 자는 중경(重卿)이며 본관은 용인(龍仁)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이백지(李伯持)의 7대손으로 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신원리에서 출생하였다. 명종 13년(1558) 무과(武科)에 급제 후 선전관에 제수된 이래 현령, 군수, 부사 등을 거쳐 함경도 북병사(北兵使)로서 두만강 하류 시전부락 여진족을 대파하고 녹둔도(鹿屯島)를 확보하였다(1588). 이 당시 장군은 김종서의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증보하여 무장들에게 참고하도록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포도대장이었던 장군은 순변사(巡邊使)로서 상주·충주에서 왜군과 싸워 패배하였으나, 경기도 양주 일원에서 약탈을 자행하던 왜군을 해유령(蟹踰嶺)에서 기습하여 30여명의 목을 베는 성과로 선조로부터 어마(御馬)를 하사받았다(1592.5). 그 후 명나라의 원병과 함께 평양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1593.1) 중국 황제로부터 백금 20냥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한양 탈환 후(1593.4) 지중추부사로 훈련도정과 군기시 제조(提調)를 겸하였고, 뒤에 3도순변사와 육군도원수로 제수되고 다시 북병사를 거쳐 한성판윤·무용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함경도 남병사(南兵使)로 되었다가 병(病)으로 체직(遞職)되어 상경하던 중 함경도 정평(定平)에서 별세하였다. 사후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장양(壯襄)이다.
묘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합장한 묘로 묘표·상석·향로석과 좌우에 문인석이 있으며 묘소 아래 어마총이 있다.
영문
Tomb of Yi Il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무신인 이일(1538-1601)과 부인 이씨의 합장묘이다.
용인시 신원리에서 태어났으며, 1558년 무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587년에는 함경도 북도의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두만강 인근의 여진족을 소탕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상주와 충주 지역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배하였다가, 경기도 양주 일원으로 후퇴하였다. 이곳에서 약탈을 자행하던 왜군을 기습하여 30여 명의 목을 베는 성과를 내어, 왕으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1593년에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중국 황제로부터 백금을 하사받았다. 이후에도 군의 요직을 지내며 군사들을 훈련시켰으며, 수도를 지키는 데 힘썼다.
묘역 입구에는 이일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가 서 있고, 봉분 앞에는 묘표, 상석, 향로석과 문인석 1쌍이 있다. 묘 앞에는 왕에게 하사받았던 말의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