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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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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관
Unbonggwan Guesthouse
"운봉관", 디지털청송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운봉관
영문명칭 Unbonggwan Guesthouse
한자 雲鳳館
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금월로 273(월막리 381-4)
지정(등록) 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제252호
지정(등록)일 1990년 8월 7일
분류 유적건조물/정치국방/궁궐·관아/관아
수량/면적 1동
웹사이트 운봉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河擔)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客舍)*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成瑍)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姜彙鈺)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尹顯岐)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中堂)에는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中堂)과 서익사(西翼舍)***가 강제로 철거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 객사(客舍):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여 외국 사신이나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를 대접하고 묵게 하던 숙소.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과 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 등이 딸려서 붙어 있다.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 전패(殿牌): 임금을 상징하는 ‘殿’ 자를 새겨 각 고을의 객사(客舍)에 세운 나무패. 공무(公務)로 간 관리나 그 고을 원이 절을 하고 예(禮)를 표시하였다.
  • 익사(翼舍): 중심이 되는 집채의 좌우에 붙어 있는 곁채.

영문

Unbonggwan Guesthouse

Guesthouses (called gaeksa in Korean) were built nearby local government offices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Guesthouses include a shrine in the center to hold a wooden tablet symbolizing the king and two rooms to either side which were used as temporary lodging facilities for officials visiting from other regions. The wooden tablet enshrined in each local guesthouse exhibited the king’s sovereignty across the country. To acknowledge this sovereignty, the local magistrate and other officials regularly performed a ceremony in which they bowed deeply toward the royal capital.

Unbonggwan was first built in 1428 as a guesthouse of the Cheongsong Local Government by Ha Dam (?-1456), the local magistrate. It was reconstructed around 1600 and underwent several repairs in the 18th and 19th centuries.

After the queen consort of King Gojong (1864-1907) was assassinated by the Japanese in 1895, civilian armies against the Japanese were raised across the country. At that time, the Confucian scholars of the Cheongsong area gathered at Unbonggwan to establish the local civilian army in March 1896.

Around 1918,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e main chamber and its west wing* were once demolished. The current building was restored in 2008 based on excavation surveys on the site and documentary investig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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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해설 내용

객사는 조선시대에 고을 관아에 설치했다. 객사는 가운데에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다른 지방에서 파견된 관리가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다. 객사에 모셔진 전패는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치권을 바탕으로 고을 수령과 관리들은 궁궐을 향해 절하는 망궐례를 행했다.

운봉관은 1428년 당시 군수였던 하담이 청송 관아의 객사로 지었다. 1600년경 중건되었고, 이후 18-19세기에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895년 일본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청송의 유생들이 운봉관에 모여 1896년 3월에 의병을 결성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경에는 중당과 서익사가 철거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