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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동 교리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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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동 교리댁
Gyoridaek House in Daesan-ri
대산동 교리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대산동 교리댁
영문명칭 Gyoridaek House in Daesan-ri
한자 大山洞 校理宅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2 (대산리)
지정(등록) 종목 시도민속문화재 제43호
지정(등록)일 1983년 6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일곽
웹사이트 대산동 교리댁,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27년(1445), 성산 이씨의 15대손인 이우(李友)가 개척한 마을로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발전시켜온 오래된 마을이다. 이후 영조 때부터는 명문으로 발돋움했고, 마을에 규모 있는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가옥 역시 영조 36년(1760)에,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 등을 역임한 이석구(李碩九)가 건립한 가옥이다. 명칭을 교리댁이라고 하는 것은 이석구의 후손인 이귀상(李龜相)이 홍문관 교리 홍문관은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이른바 언론 삼사라고 했다.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정승·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을 거쳐갔다. 그 중 교리는 정5품 관직이다. 를 역임한 데서 비롯되었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중문채, 사당, 서재 등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사랑채, 사당, 서재는 1870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안채는 여성공간, 사랑채는 남성공간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로 썼다. 대문채는 대문 옆에 붙여 지은 집으로 주로 아랫 사람이 생활하였다. 중문채 역시 중문 옆에 붙여 지은 집을 뜻한다. 사당은 민가에서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서재는 서적을 갖추어 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곳이다.

영문

Gyoridaek House in Daesan-ri


영문 해설 내용

한개마을(국가민속문화재 제255호)은 1445년 조선 초기의 문신인 이우가 입향한 이래 성산이씨가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총 75채의 가옥이 있으며, 이 중 일곱 가구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760년에 지어진 이 집은 문화재로 지정된 일곱 집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조선시대의 문신이었던 이석구가 지었다. ‘교리댁’이라는 이름은 이석구의 후손인 이귀상이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데서 비롯되었다.

가옥은 대문채, 사랑채, 서재, 중문채, 안채, 사당 등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사당, 서재는 1870년에 고쳐 지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툇마루가 딸린 온돌방을 두었다. 맨 오른쪽에 부엌이 있다. 원래 안채 앞에는 다른 건물들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