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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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閑山大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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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안내판: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
해설문
국문
한산대첩은 선조 25년(1592)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정예 수군을 무찌른 전투이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7월 8일과 10일에 각각 한산도 앞바다와 안골포*에서 왜군을 크게 이겼다. 한산도 앞바다에서는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수군을, 안골포에서는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의 수군을 쳐부수었다.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이 큰 승리를 거둔 데는 학익진**과 거북선***, 판옥선**** 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전투에서 왜적의 배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빼앗았으며 20여 척을 불태웠다. 조선 수군은 한산대첩의 승리로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진을 막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켰다.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패배 이후 더 이상 경솔하게 조선 수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한산대첩은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진주대첩, 권율(權慄) 장군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불리고 있으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4대 해전에 속하는 유명한 해전으로 알려져 있다.
- 안골포(安骨浦):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동에 있었던 포구
-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반원의 형태이기 때문에 적을 포위하면서 공격하기에 적합한 진법이다.
- 거북선: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복원한 군함으로 그 크기는 판옥선과 비슷하였으나 돌격선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사천해전과 한산해전에서 왜적의 배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3척 정도가 있었으나 1595년 이후에는 5척 정도가 되었다.
- 판옥선(板屋船):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2층 구조의 전투선으로 명종 10년(1555)에 만들었다. 노를 담당하는 병사는 아래층에, 공격을 담당하는 병사는 위층에 배치하여 서로 방해를 받지 않고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선체가 높아서 위에서 아래로 활이나 대포를 쏘면 명중률이 높았고, 적병이 기어오르기에 힘든 구조였다. 승선 인원은 125명~130명 정도가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200명까지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
- "이순신 함대의 한산도 대첩", 하늘에서 바라본 한국의 숨결, 네이버 블로그, 2017.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