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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모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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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재
Morijae Ritual House
거창 모리재,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모리재
영문명칭 Morijae Ritual House
한자 某里齋
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강선대길 96-326[농산리 673]
지정(등록) 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07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4동
웹사이트 거창 모리재”, 경남관광 길잡이.



해설문

국문

모리재는 병자호란(1637년) 때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정온(鄭蘊)이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은거했던 곳을 기리어 세운 서원 형태의 재실이다.

이곳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딘지 모른다는 뜻으로 ‘모리’라 하였다.

선생은 엉성하고 불품 없는 집이란 뜻으로 이곳을 “구소(鳩巢)”라 이름 지었다. 또한 고사리를 캐어먹고 굶어 죽었다는 고사에서 “채미헌(採薇軒)”이라 부른 충절의 공간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인조 23년(1645) 영당을 세워서 제향하였으나 숙종 30년(1704)에 불타 없어졌고 숙종 33년(1707)에 새로 지어 모리재라 하였다. 1758년에 유허비를, 1806년에 화엽루를 세웠다. 현재 건물은 1921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후기와 일제감정기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전국 유림들의 탐방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영문

Morijae Ritual House


영문 해설 내용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문신인 정온(1569-1641)을 기리는 재실이다.

정온은 1610년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인조(재위 1623-1649)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수치를 참을 수 없어 자결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정온이 세상을 떠난 후, 1645년 이곳에 영당을 세워 제향하였다. 1704년 영당이 불에 타 없어졌고, 1707년에 새로 지으면서 ‘모리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리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어딘지 모르는 곳’이라는 뜻이다.

1758년에 정온을 기리는 유허비를 세우고, 1806년에는 정문 역할을 하는 문루인 화엽루를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21년대 대대적으로 중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