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만산고택
봉화 만산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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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봉화 만산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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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奉化 晩山古宅 |
주소 | 경상북도 봉화군 서동길 21-19 |
지정(등록) 종목 | 국가민속문화재 제279호 |
지정(등록)일 | 2013.12.12 |
분류 |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
시대 | 조선 |
수량/면적 | 일곽(건물 4동, 토지 3,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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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만산 고택은 조선 후기 때의 문신(文臣)인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 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건립한 집이다.
선생은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과 도산서원장(陶山書院長) 등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학문으로 달래면서 마을 뒷산에 망미대(望美臺)를 쌓고, 그곳에 올라 국운(國運)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 고택(古宅)은 11칸 규모의 긴 행랑채가 있고,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있고, 정면에 측면출입형(側面出入形)의 ‘口’자형 본채가 있다. 사랑마당 왼쪽으로 서실(書室)을 두고, 오른쪽에 토석 담장을 두른 별당(別堂)인 칠류헌(七柳軒)이 있다.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직접 쓴 ‘만산(晩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서실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영친왕(英親王)의 친필 현판도 걸려 있다. 이로 보아 당시 선생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본채와 서실, 별당, 대문채처럼 조선 후기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주택 구성을 고루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북 북부 지방의 건축 특성을 잘 보존하고 있어 조선 시대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영문용 원고
Mansan Historic House, Bonghwa
This traditional Korean house was used as the residence of Kang Yong (1846-1934). 강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도산서원장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이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878년에 건립된 이후 만산고택에는 현재까지 5대에 걸쳐 강용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만산고택은 크게 다섯 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 안채, 사랑채, 행랑채, 마당 왼쪽에 서실, 오른쪽에 별도의 토석 담장을 두른 별당인 칠류헌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주택 구성을 고루 갖춘 것이다.
만산고택에서는 유서 깊은 여러 현판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의 ‘만산(晩山)’이라는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것이다. 대원군은 강용의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지며, 강용에게 친히 ‘대기만성의 큰 인물’이라는 뜻의 호를 지어주었다. 서실에 걸린 ‘한묵청연(翰墨淸緣)’은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이라는 뜻으로, 영친왕이 8세에 쓴 글씨다.
참고자료
- "봉화 만산 고택", 『지나간 시간을 읽다-민속문화재, 이야기를 입다』, 문화재청, 2017.
- 윤현주, "고택을 찾아서 - 10. 봉화 만산고택", 『부산일보』, 2018년 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