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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용 처 전주이씨 효열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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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용 처 전주이씨 효열 천장
대표명칭 김필용 처 전주이씨 효열 천장
한자 金弼龍 妻 全州李氏 孝烈 薦狀
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범평리 406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92호
지정(등록)일 2015년 6월 11일
분류 기록유산/문서류/민간문서/기타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20점



해설문

국문

19세기 말 진주와 산청 지역 유림이 경남 진주 백곡리에 살았던 전주 이씨(全州 李氏)에게 효열(孝烈)*을 표창하는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청원한 문서이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표창하는 일이고, 천장(薦狀)은 청원서이다.

주인공 전주 이씨는 경주 김씨 가문 김필용(金弼龍 · 미상~1722)의 처였다. 이 지역 유림은 1859년부터 1892년까지 30여 년간 무려 20회에 걸쳐 암행어사, 진주목사, 산청군수 등에게 청원을 넣었다. 동참한 유림은 이씨의 손자 김병섭(金秉燮)을 비롯해 568명에 달했다.

당시 진주와 산청 지역 유림이 효열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한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 효열: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부모를 잘 섬기고 정절을 잘 지킨 행위를 일컬음. 조선시대에는 효열을 가정 윤리의 기본으로 중요하게 여겼음.

영문

영문 해설 내용

1859년부터 1892년 사이에 진주와 산청 지역의 유림들이 올린 청원서들이다.

이들은 30여 년 동안 암행어사와 진주 목사, 산청 군수 등에게 총 20회에 걸쳐 진주 백곡리에 살았던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효행과 정절을 기려 정려를 내려줄 것을 청원했다. 동참한 유림은 손자 김병섭(金秉燮)을 비롯해 568명에 달한다.

이 문서들은 현재 1998년 폐교된 초등학교의 건물을 활용해 개관한 미리벌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문화재청 이미지/설명 없음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