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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은 가톨릭 교도를 박해하던 시기에 나주에서 순교한 네 사람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곳이다. 이춘화(베드로)는 공주 출신으로 나주에 이주해 살았는데 기해박해(1839) 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병인박해(1866-1872) 때인 1872년에는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바오로)가 순교하였다. 강영원은 돌무더기에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석침형을 당했고, 유치성은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종이를 거듭 붙여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을 당했다. 유문보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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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7일 현玄 대주교 기념관의 맞은편에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였다. 이때 나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나주 관아의 군사 훈련장이자 형장이었던 무학당 터의 흙을 떠 와 묘원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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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9일 (금) 14:21 판


천주교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 天主敎 羅州 殉敎者 紀念 聖堂
Goto.png 종합안내판: 나주성당



해설문

국문

천주교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은 가톨릭교도를 박해하던 시기에 나주에서 순교한 네 사람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 공주 출신 이춘화(베드로)는 나주에 와서 산 지 얼마 안 돼 체포된 후 고문을 받고 33세에 순교하였다. 그 후 병인박해(1866)가 끝나갈 무렵인 1872년에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이 나주 무학당(武學堂, 조선시대 전라 우영의 군사 훈련장) 앞에서 석침형(石針刑)과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당해 순교하였고, 유문보(바오로)는 고문을 받아 중병에 걸려 옥사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선대부터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로서 신심이 매우 깊었다.

2011년 5월 17일에 나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무학당 터의 흙을 취토하여 현玄 대주교 기념관의 맞은편 쉼터 부지에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였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천주교 나주 순교자 기념 성당은 가톨릭 교도를 박해하던 시기에 나주에서 순교한 네 사람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곳이다. 이춘화(베드로)는 공주 출신으로 나주에 이주해 살았는데 기해박해(1839) 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병인박해(1866-1872) 때인 1872년에는 강영원(바오로), 유치성(안드레아), 유문보(바오로)가 순교하였다. 강영원은 돌무더기에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석침형을 당했고, 유치성은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종이를 거듭 붙여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을 당했다. 유문보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2011년 5월 17일 현玄 대주교 기념관의 맞은편에 순교자 묘원을 조성하였다. 이때 나주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나주 관아의 군사 훈련장이자 형장이었던 무학당 터의 흙을 떠 와 묘원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