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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분산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무덤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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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2는 고분 1보다 조금 작은 직경 최대 5.5m, 높이 최대 2m 규모이며, 6세기 중반~후반 사이에 고분 1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석이 노출되고 한쪽 벽이 파괴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였던 상태였지만, 근래에 흙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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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2는 고분 1보다 조금 작은 직경 최대 5.5m, 높이 최대 2m 규모이며, 6세기 중반~후반 사이에 고분 1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석이 노출되고 한쪽 벽이 파괴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였던 상태였지만, 지금은 흙을 덮었다.''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고 남쪽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을 두었으며 봉토를 덮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고 남쪽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을 두었으며 봉토를 덮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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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본래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내부가 노출되었던 고분이 작은 규모의 고분인지 대성동에 가까운 쪽의 고분(백운대고분)인지 확인 한 번 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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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가 노출되었던 고분이 작은 규모의 고분이 맞는지 확인 한 번 더 필요.
  
  

2020년 4월 26일 (일) 04:45 판


김해 구산동 고분군
Ancient Tombs in Gusan-dong, Gimhae
김해 구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김해 구산동 고분군
영문명칭 Ancient Tombs in Gusan-dong, Gimhae
한자 金海 龜山洞 古墳群
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지정번호 사적 제75호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시대 가야
수량/면적 3,663㎡
웹사이트 김해 구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분산(盆山)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가야멸망기 내지는 신라시대의 고분군이다. 원래는 대규모의 고분군이었으나 최근까지 계속된 파괴로 현재는 겨우 3기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수로왕비릉 동쪽 100m 거리에 2기의 고분이 있고, 200m 정도 떨어져 산복도로 변의 높은 곳에 1기의 고분이 있다. 산복도로 변에 위치한 고분은 최근에 구산동 백운대고분(龜山洞 白雲臺 古墳)으로 개칭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굴조사되었던 삼산리 1호분은 수로왕비릉에 가까운 직경 12.8m, 높이 4m의 거대한 봉토를 가진 고분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고분은 굴식돌방무덤[積穴式石室墳]으로서 동서 3.4m, 남북 3m의 장방형 돌방[石室]에 남쪽으로 연도(羨道)가 달려있다. 4벽은 위로 가면서 좁혀 쌓았고, 좁아진 천정은 2장의 뚜껑돌[蓋石]로 덮었다. 돌방 바닥에는 ㄱ자 모양의 관대(棺臺)가 만들어졌다.

수정 국문

초고

고분 1

이곳은 분산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무덤군이다.

수로왕비릉의 오른편에 가깝게 위치한 고분 1은 직경 최대 12.8m, 높이 최대 4m 규모로, 1919년 발굴을 거쳐 사적 제109호 ‘삼산리 고분(三山里 古墳)’으로 지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은 바닥에 ‘ㄱ‘자 모양의 관 받침대를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였으며,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였다.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은 남쪽으로 두었고 봉토를 덮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발견된 토기가 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무덤은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가 된다.

고분 2

이곳은 분산에서 수로왕비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한 무덤군이다.

고분 2는 고분 1보다 조금 작은 직경 최대 5.5m, 높이 최대 2m 규모이며, 6세기 중반~후반 사이에 고분 1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석이 노출되고 한쪽 벽이 파괴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였던 상태였지만, 지금은 흙을 덮었다.

주위에 호석을 둘러 묘역을 구분하고 남쪽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와 출입문을 두었으며 봉토를 덮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은 김해 지역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고분 1과 같이 6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금관가야 멸망 이후 김해지역에 남아 있는 금관가야 왕족 후예 혹은 신라 중앙 정부와 관계된 지방 유력자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본래 많은 수의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거의 없다.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 내부가 노출되었던 고분이 작은 규모의 고분이 맞는지 확인 한 번 더 필요.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참고 자료

→문화재 현황 및 특징 확인 가능

→구산동 고분군 내력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