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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4일 (금) 11:03 판


김종무충신정려비
김종무충신정려비, 디지털구미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표명칭 김종무충신정려비
한자 金宗武忠臣旌閭碑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139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일 1999년 8월 9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216㎡
웹사이트 김종무 충신정려비,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정려비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비석을 뜻한다. 김종무 충신정려비는 조선 중기의 선산인(善山人) 김종무(金宗武)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이다.

김종무는 조선 선조 24년(1591)에 경상남도 함양(咸陽) 지역의 사근도* 찰방**을 지내고 있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순변사(巡邊使) 이일의 지휘 아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상주(尙州) 북천(北川)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순절한 김종무(金宗武)의 충절을 기려 이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정면에는 “충신김종무지려(忠臣金宗武之閭,충신 김종무의 정려비)”라는 비문을 새겼다.

김종무 충신정려비를 보존하고 있는 정려각은 고종 33년(1896)에 다시 고쳐 지었다. 정려각은 원래 관산의 산자락에 있었는데 2020년 2월 황산의 산자락으로 옮겨 지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사근도(沙斤道): 경상도 함양의 사근역(沙斤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 찰방(察訪): 조선 시대에,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外職) 문관의 벼슬.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이 비석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종무(1548-15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75년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에게 정려 현판 또는 정려비를 내렸으며, 정려를 받은 사람의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우거나 정려각을 세워 모셨다.




정려비는 충신·효자·열녀 등의 언행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의 입구에 세우는 비석을 뜻한다. 김종무 충신정려비는 조선 중기의 선산인(善山人) 김종무(金宗武)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이다.

김종무는 조선 선조 24년(1591)에 경상남도 함양(咸陽) 지역의 사근도* 찰방**을 지내고 있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순변사(巡邊使) 이일의 지휘 아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상주(尙州) 북천(北川)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순절한 김종무(金宗武)의 충절을 기려 이 비석과 비각을 세우고, 정면에는 “충신김종무지려(忠臣金宗武之閭,충신 김종무의 정려비)”라는 비문을 새겼다.

김종무 충신정려비를 보존하고 있는 정려각은 고종 33년(1896)에 다시 고쳐 지었다. 정려각은 원래 관산의 산자락에 있었는데 2020년 2월 황산의 산자락으로 옮겨 지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