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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2일 (월) 14:23 판
경주 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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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경주 간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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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 諫墓 |
주소 | 경북 경주시 황성동 471번지 |
지정번호 | 경상북도 기념물 제31호 |
지정일 | 1982년 8월 4일 |
분류 | 유적건조물/무덤/무덤/기타 |
수량/면적 | 1,990㎡ |
웹사이트 | 경주 간묘,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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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신라 제26대 진평왕(재위 579∼632)대의 충신이었던 김후직(金后稷)의 무덤으로 전해 온다. 김후직은 진평왕 2년(580)에 병부령*을 지냈다. 진평왕이 사냥만을 즐기고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아 중지할 것을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세 아들에게 유언을 하여 왕이 사냥 다니는 길목에 묻게 해 죽은 뒤에라도 왕을 깨우쳐 주겠다고 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충신으로 불려온 것이다.
죽은 후에도 왕에게 했던 그의 충성을 사람들은 ‘묘간(墓諫)’이라 칭송하였고, 그의 무덤을 간묘라고 불렀다. 묘 앞에 조선 숙종 36년(1710) 경주부윤 남지훈(南至熏)이 세운 비석이 남아있다.
- 병부령(兵部令): 신라 시대 병부(兵部)의 으뜸 벼슬. 법흥왕 때에는 1명을 두었다가 진흥왕과 태종 때 각각 1명씩 늘려 모두 3명을 두었다. 재상과 사신(私臣)을 겸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