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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로 직봉 - 용인 석성산 봉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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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4년 5월 24일 (금) 20: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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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로 직봉 - 용인 석성산 봉수 유적
대표명칭 제2로 직봉 - 용인 석성산 봉수 유적
한자 第2路 直烽 - 龍仁 石城山 烽燧 遺蹟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 77-33 일원
지정번호 사적
지정일 2023년 1월 10일
분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통신 / 봉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지정구역 2필지(1,393㎡) / 보호구역 2필지(5,941㎡)
웹사이트 제2로 직봉 - 용인 석성산 봉수 유적,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청.



해설문

국문

종합

용인 석성산 봉수는 석성산 정상인 471m에 만들어진 것으로 경기 남부에서 광주와 성남, 하남, 송파(한양)로 이어지는 교통로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조선 최후기 봉수망을 알 수 있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에 의하면 제2로 직봉은 부산 다대포진 응봉봉수에서 시작하는 노선으로 총 44개소가 해당된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제2로 노선에 해당하며 삼남지방의 봉수가 안성 망이산 봉수에서 결집한 후 용인 건지산 봉수(원삼면 소재)-용인 석성산 봉수-성남 천림산 봉수를 거쳐 한양 목멱산 봉수(경봉수)로 이어진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화성 흥천산 봉수도 수신하고 있어 18세기 화성 봉돈 설립 이후 신설된 봉수체계에 석성산 봉수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용인 석성산 봉수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봉수대 보호시설인 방호벽, 연기와 불빛으로 국경의 위급상황을 알리는 신호시설인 연조(불을 피우는 굴뚝 시설), 불을 켜기 위한 비품과 재료를 보관하는 창고(庫舍, 假家)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다량의 고려~조선시대 기와, 도·자기편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돌을 사용하여 만든 네모난 형태의 시설에서 조선후기에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향로와 제기가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석성산 봉수에서 중요한 의례가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석성산 봉수가 조선시대 제2거 봉수 노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봉수터 아래쪽에 있는 우물터와 건물지에 대해서도 2019년~2020년 5월까지 추가 조사를 실시하여 석성산 봉수를 운영하던 봉수군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확인되어 봉수의 구조와 운영체계에 관한 기본 자료를 확보하였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문화유산 가치를 인정받아 2023년 1월 제2로 봉수 노선 44개소 중에서 14개소의 국가 사적 지정에 포함되었다.

거화시설과 비품

주연야화(晝煙夜火)의 봉수제에서 매일 1개의 거화1)를 위한 각종 시설과 재료 등의 비품은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이들 거화재료는 1회용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평상시 이를 갖추어 놓지 않으면 봉수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봉수의 거화를 위한 시설과 비품은 조선 후기 발간 지지2)를 통해 알 수 있다. 우선 지지에 보이는 거화시설(炬火施設)은 ‘연대·연굴·화덕’ 등이다. 그리고, 거화비품(炬火備品)은 ‘부싯돌[火石]·부시[火鐵]·부시돌[火鐵石]’ 등이다. 화약심지[火繩]는 봉수마다 1개 내지 2개 혹은 5개씩 갖추고 있었다.

거화재료(炬火材料)는‘싸리나무[杻]·소나무[松]·삼[麻]·산솔갱이·땔나무[積柴·柴木]·쑥[艾]·풀[草]’과 ‘말[馬]·소[牛]·닭[鷄]’의 배설물인 똥[糞]을 비치하였다. 이중 닭똥[鷄糞]은 한반도 북부지역 소재의 일부 봉수에 비치하고 있던 거화재료의 일종이다. 이중 ‘싸리나무·산솔갱이·땔나무·쑥·풀’ 등은 봉수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그러나 말[馬]·소[牛]·닭[鷄]의 배설물인 똥[糞]과 회(灰)·조강·가는 모래 등은 주위에서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재료들은 봉수군이 비번에 틈틈이 민가에서 준비하였다가 운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된 재료는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소나무[松]이다. 이외 소량이지만 가는 모래[細沙]·쑥[艾]·풀[草]·삼홰[麻杻炬]·산솔갱이[生松]나 산솔갱이 가지[生松枝]·토목(土木) 등이 보조원료로 사용되었다.

지지에 보이는 거화재료의 수량은 단위가 대부분 ‘5’이다. 이는 조선의 봉수제가 5거를 근간으로 평화시의 1거 외에 사변(事變)과 비상시에 대비하여 상시적으로 비축해 놓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각 봉수별로 10종이 넘는 다수 1회용 소모성 거화재료를 비치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봉수군은 산중에서 후망3) 외에 거화시 소모되는 거화재료를 비치하기 위해 번(番)을 서는 동안 바쁜 일과를 보내야만 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종합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과 같은 군사정보를 알리던 통신 수단이다. 신호가 잘 보이도록 산봉우리에 설치했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다섯 개의 연조에 불을 피워서 상황을 알리는 신호를 전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봉수망을 통해 중앙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다섯 개의 직봉을 중심으로, 직봉 사이에는 간봉을 두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는 1894년 근대통신수단이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용인 석성산 봉수는 석성산 정상인 471m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 남부에서 광주와 성남, 하남, 송파로 이어지는 교통로로 진입하기 위한 교통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석성산 봉수는 남쪽의 건지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성남 천림산 봉수를 거쳐 목멱산으로 신호를 전달하였다. 석성산 봉수가 속한 제2로 직봉은 부산의 응봉봉수에서 서울의 목멱산까지 총44개 봉수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중 14개 봉수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석성산 봉수 유적은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봉수대 보호시설인 방호벽, 불을 피우는 굴뚝 시설, 불을 켜기 위한 비품과 재료를 보관하는 창고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다량의 고려~조선시대 기와와 도기·자기편이 출토되었고, 특히 조선 후기에 관요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자 향로와 제기도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석성산 봉수에서 중요한 의례가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석성산 봉수가 조선시대 제2거 봉수 노선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수터 아래쪽에 있는 우물터와 건물지에 대해서는 2019년~2020년 5월까지 추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봉수를 운영하던 봉수군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확인되어 봉수의 구조와 운영체계에 관한 기본 자료를 확보하였다.

거화시설과 비품

조선시대 각 봉수에는 다섯 개의 연조가 있었다. 봉수는 평화로울 때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신호를 올렸다. 따라서 모든 봉수는 매일 1개의 불을 피우기 위한 시설과 재료를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했다.

조선시대 봉수에서 불을 피우기 위한 시설로는 연대, 연굴, 화덕 등이 있었고, 부싯돌[火石], 부시[火鐵], 부시돌[火鐵石] 등을 사용하여 불을 붙였다.

불을 피우는 재료로는 싸리나무, 소나무, 삼[麻], 산솔갱이, 땔나무[積柴·柴木], 쑥, 풀과 같이 봉수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된 재료는 소나무이다. 이와 함께 말·소·닭의 배설물(똥)과 회(灰)·조강·가는 모래 등도 사용했는데, 이런 재료들은 주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에 봉수군이 비번에 민가에서 준비하였다가 운반한 것으로 여겨진다. 닭의 배설물은 한반도 북부 지역 소재의 일부 봉수에서 사용하였다.

불을 피우는 재료는 연조의 수에 맞추어 보통 5개 단위로 준비하였다. 또한, 각 봉수별로 10종이 넘는 다수 1회용 소모성 재료를 비치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봉수군은 산중에서 후망(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살펴보며 경계함)하는 일 외에도 불을 피울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 바쁜 일과를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