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영규대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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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무덤은 임진왜란 때 최초로 승병(僧兵)을 일으킨 영규대사(?~1592)의 묘소이다. 대사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계룡산 갑사에 들어가 출가한 후 서산새사 휴정(西山大師 休靜)의 문하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들을 모아 승병장이 되어,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淸州城)을 탈환하였다. 이후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큰 부상을 입고 공주 갑사로 돌아오다가 월암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묘소는 갑사 승려들이 조성하였으며, 묘 앞에는 순조 10년(1810) 영규의 방계 후손들이 세운 묘비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무덤은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僧兵將)인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의 묘소이다.

대사는 공주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에 출가한 후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의 문하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였다. 그는 또한 계룡산 갑사 청련암(靑蓮庵)과 금산 보석사(寶石寺)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과 함께 청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거병한 승병장으로서 그의 거병과 승전보는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소식을 듣고 그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 전투에서 의병장 조헌 등 7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였고, 현재의 묘소부근에서 와서 숨을 거두었다. 대체로 승려들은 임종 후 화장을 하는데, 계룡산 갑사의 승려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특별히 무덤을 만들었다.

1810년(순조 10)에는 대사의 방계 후손인 박경진(朴景震), 박경태(朴景兌)가 묘비를 세웠다. 묘비의 앞면에는 ‘의병 승장군 영규지묘(義兵 僧將軍 靈圭之墓)’라 적었고, 뒷면에는 ‘숭정후3경오 4월 대방손 박경진·경태형제(崇禎後三庚午四月代傍孫朴景震景兌兄弟)’라고 기록되어 있다. 봉분 앞 상석의 전면에는 ‘의병승장 기허당(義兵僧將騎虛堂)’이라고 새겨져 있다.

1차 수정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인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의 묘소이다.

대사는 공주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한 후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의 문하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였다. 또한 계룡산 갑사 청련암과 금산 보석사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다. 그러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1천 명을 모집하여 승병장이 되었으며,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과 함께 청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장으로서 그의 승전보는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소식을 듣고 그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였고, 현재의 묘소 부근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체로 승려들은 임종 후 화장을 하는데, 계룡산 갑사의 승려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특별히 무덤을 만들었다.

순조 10년(1810)에는 대사의 방계 후손인 박경진(朴景震), 박경태(朴景兌)가 묘비를 세웠다. 봉분 앞 상석의 전면에는 ‘의병승장 기허당(義兵僧將騎虛堂)’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기허당은 영규대사의 호이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없음.
  2. 분야별 자문위원 2
    • 그러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 그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장으로서 그의 승전보는 ->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장으로서 그의 승전보는
    • 대체로 승려들은 임종 후 화장을 하는데, 계룡산 갑사의 승려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특별히 무덤을 만들었다. -> 계룡산 갑사의 승려들은 화장(火葬)을 하는 대신 대사가 숨을 거둔 장소에 무덤을 만들었다.
    • 봉분 앞 상석의 전면에는 ‘의병승장 기허당(義兵僧將騎虛堂)’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기허당은 영규대사의 호이다. -> 봉분 앞 상석에는 영규대사의 호를 따서 ‘의병승장 기허당(義兵僧將騎虛堂)’이라고 새겼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문장이 전체적으로 '~하였고, 했다'는 식의 패턴이 반복됩니다. 읽는 사람의 호흡을 감안해서 문장을 간결하게 정리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 순조 10년(1810)에는 대사의 방계 후손인

2차 수정

임진왜란 때의 승병장인 영규대사(靈圭大師, ?~1592)의 묘소이다.

대사는 공주 출신으로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한 후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의 문하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였고, 계룡산 갑사 청련암과 금산 보석사에서 수도하면서 무예를 익혔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1천 명을 모집하여 승병장이 되었으며,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과 함께 청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병장으로서 그의 승전보는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는 승전소식을 듣고 그에게 벼슬과 옷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하사품이 도착하기도 전에 금산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싸우다가 부상을 당하였고, 현재의 묘소 부근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체로 승려들은 임종 후 화장을 하는데, 계룡산 갑사의 승려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특별히 무덤을 만들었다.

순조 10년(1810) 대사의 방계 후손인 박경진(朴景震), 박경태(朴景兌)가 묘비를 세웠다. 봉분 앞 상석에는 영규대사의 호를 따서 ‘의병승장 기허당(義兵僧將騎虛堂)’이라고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