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역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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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한중연 안내문안 작성

기존 국문

이 서원은 1570년 퇴계 이황의 발의로 고려 말기의 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역동은 중국에서 주역(周易)이 전해졌을 때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한달 여 만에 주역의 이치를 완전히 알아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역동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684년(숙종 10)에 사액을 받은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1969년에 현재의 장소에 복원하였다. 제향공간인 내삼문과 사당, 강학공간인 강당과 동․서재 및 외삼문, 그리고 고직사(庫直舍)로 구성되어 있다.

역동서원은 안동 지역의 최초의 서원이며, 또한 조선시대 서원제도를 정착시킨 퇴계 이황의 서원 창설 운동의 상징적인 서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곳은 고려 후기의 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2~1342)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우탁은 단양 출신으로 1290년(충렬왕 16) 고려 문과에 급제하였다.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북송의 성리학자 정이(程頤, 1033~1107)의 저술 『역전(易傳)』이 고려에 들어오자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이를 깊이 연구하고 터득하여 생도들을 가르쳤다. 역동(易東), 즉 ‘역이 동쪽으로 왔다.’는 우탁의 호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우탁은 만년에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였다. 예안 사람인 이황(李滉, 1501~1570)은 우탁을 존숭하여 역동서원의 건립을 발의하였고, 1570년(선조 3) 역동서원이 설립되었다. 이후 1684년(숙종 10) 왕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안동댐 건설 계획으로 인해 1968년 원래의 위치가 아닌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고, 1983년 국립안동대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역동서원은 정문인 입도문(入道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과 원생들이 기숙했던 사물재(四勿齋)와 삼성재(三省齋), 우탁의 위패를 모신 상현사(尙賢祠), 그 외 서원의 부속 건물로 구성되었다. 서원에는 이황의 역동서원기와 다수의 친필 현판(역동서원, 상현사, 광명실, 사물재)이 걸려 있다. 역동서원은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이자 이황의 서원 창설 운동의 상징적인 서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

1차 수정

역동서원은 고려 후기의 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2~1342)을 기리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 제향과 교육의 기능을 수행했다.

우탁은 단양 출신으로 129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북송의 성리학자 정이(程頤, 1033~1107)의 저술 『역전(易傳)』이 고려에 들어오자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던 우탁이 이를 깊이 연구하고 터득하여 생도들을 가르쳤다. 역동(易東), 즉 ‘역이 동쪽으로 왔다’는 우탁의 호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우탁은 만년에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였다. 예안 사람인 이황(李滉, 1502~1570)은 우탁을 존숭하여 역동서원의 건립을 발의하였고, 1570년에 역동서원이 안동 지역 최초의 서원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1684년에 사액을 받았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안동댐 건설 계획으로 인해 1969년 원래의 위치가 아닌 지금의 자리에 복원하였고, 1991년 국립안동대학교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서원을 관리하고 있다.

역동서원은 정문인 입도문(入道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과 원생들이 기숙했던 사물재(四勿齋)와 삼성재(三省齋), 우탁의 위패를 모신 상현사(尙賢祠), 그 외 서원의 부속 건물로 구성되었다. 서원에는 이황의 역동서원기와 다수의 친필 현판(역동서원, 상현사, 광명실, 사물재)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