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송석재사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대박(大朴) 김철(金澈, 1569~1616)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조선 중기에 건립되었다.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임하면 사의동에 있던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겼다.
이 재사는 정침(正寢)을 중심으로 좌․우익사(左右翼舍)를 두고 앞쪽에는 5칸의 누각을 설치하여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정침은 좌측으로부터 4칸의 부엌, 1칸의 온돌방, 1칸의 마루, 1칸의 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익사에는 2칸의 온돌방, 1칸의 부엌이 있으며, 우익사는 1칸의 온돌방과 2칸의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마루의 기둥 위에는 보아지[樑奉]를 만들어 대들보를 보강하였으며, 정침 부엌에서 서쪽 외부로 통하는 판문(板門)에는 나무로 돌쩌귀를 만들어 문을 열고 닫는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전면 누마루의 2짝 판문은 미닫이로 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여닫이로 된 것과는 다르다. 옛날의 가옥을 짓는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 배치에 있어서도 전면에 누마루를 세우고 그 하부를 통해 정침으로 출입하도록 한 것은 특이한 수법이라 하겠다.
수정 국문
초고
송석재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안동을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철(金澈, 1569~1616)의 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조선 중기 때의 건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다.
재사는 폐쇄적인 ‘ㅁ’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전면에 있는 누마루의 아래층을 통해 경내 진입이 가능하다. 제사를 올리는 중심 공간인 정침(正寢)은 왼쪽부터 부엌, 온돌방, 마루, 온돌방 순으로 되어 있고, 양쪽 날개채에도 각각 온돌방과 부엌이 있다.
건물 서쪽에 해당하는 왼쪽 날개채에는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나 있는데, 이 문에는 나무로 된 경첩을 달았다. 또 2층으로 된 누마루는 외부를 향해 판벽을 세우고, 미닫이로 된 판문을 설치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비교적 오래된 건축 기법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본래 임하면 사의리에 있었는데,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인해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어졌다.
- 재사의 이름 ‘송석(松石)’은 낙동강 상류 지류에 속하는 반변천(半邊川)을 따라 설정되었던 ‘임하구곡’과 연관이 있다. 재사가 처음 자리하고 있었던 ‘송석산’을 휘감아 돌아나가는 좁은 골짜기를 송석이라고 불렀고, 이곳에는 재사 외에도 그의 산소와 ‘송석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몰되어 확인할 수 없다.
- 김철은 천전리에서 후진 양성에 힘쓰며 의성김씨 가문의 기반을 닦은 청계 김진(靑溪 金璡, 1500-1580)의 손자이다. 친부는 김진의 둘째 아들 김수일(金守一)로, 아들이 없던 맏아들 김극일(金克一)의 양자로 입적해 장손이 되었다. 김철의 아들은 병자호란 이후 도연폭포 근처에 와룡초당에 은거했던 선비 표은 김시온(瓢隱 金是榲, 1598~1669)이다.
1차 수정
송석재사는 김철(金澈, 1569~1616)의 묘소를 관리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워졌다. 김철은 의성김씨 중 안동에 처음으로 정착한 김만근(金萬謹, 1446~1550)의 4대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안동 지역을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송석재사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알 수 없고, 원래 임하면 사의리의 깊은 골짜기에 있었다고 한다.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198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어졌다.
재사는 정침을 중심으로 양옆에 날개채를 두고 맨 앞에 누각을 세워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누각 앞면에는 판벽을 세웠고, 아래층에 미닫이로 된 판문을 설치하여 재사 안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정침은 제사를 올리는 중심 공간으로 왼쪽부터 부엌, 온돌방, 마루,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양쪽 날개채에도 각각 온돌방과 부엌이 있다. 왼쪽 날개채에는 출입문이 하나 있는데, 이 문에는 나무로 된 경첩을 달았다. 또 2층으로 된 누마루는 외부를 향해 판벽을 세우고, 미닫이로 된 판문을 설치했다. 이러한 요소들은 비교적 오래된 건축 기법을 보여주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