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안동 성성재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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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중기 학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 , 1530~1604)의 집이다. 그는 본관이 봉화이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이다. 명종(明宗) 16년(1561) 생원시에 합격한 뒤 봉화현감 등을 지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예안(禮安) 수성장(守城將)으로 활약하였다. 사후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위패는 이 건물의 뒤편에 조성된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침(正寢), 아랫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침의 우측에 있으며, 아랫채는 정침의 좌측에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반 규모의 ‘口’자형 맞배지붕이다. 18세기에 지어진 안동지방의 상류주택으로 시대성과 지역성이 잘 드러나는 건물이다. 또한 금난수는 35세 때인 1564년에 이 건물의 아래 동계(洞溪)가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손수 ‘성재(惺齋)’라는 현판과 팔영시(八詠詩)를 써주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조선 중기 학자인 성성재(惺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종가가 대대로 살던 집이다.

금난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이며. 명종(明宗) 16년(1561) 생원시에 합격한 뒤 봉화현감 등을 지냈다, 사후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지금의 건물을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건축 양식이 조선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정침(正寢)), 아래채(여러 채로 된 집의 아래쪽에 있는 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침의 우측에 있으며, 아래채는 정침의 좌측에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반 규모의 ‘口’자형 맞배지붕건물이다. 상방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지만 이 집은 대청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안방이 중앙으로 있고, 상방이 대청 앞쪽으로 밀려난 모습을 보여준다. 18세기에 지어진 안동 지역 상류 주택으로서 시대성과 지역성이 잘 간직되어 있다.

초고 수정

이 집은 조선시대의 학자 성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 , 1530~1604)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종택으로, 지금의 건물은 18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다. 종택이란 한 문중에서 맏이로 이어 온 가족이 대대로 사용해온 집을 말한다.

금난수는 경상북도 봉화 출신으로, 명종 16년(1561)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은거하며 노모를 모시다가, 정유재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여 안동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집은 ‘ㅁ’자형의 본채, 본채 왼편에 자리한 아래채,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의 앞면에는 중문을 기준으로 좌우에 작은사랑과 큰사랑을 배치했으며,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달았다. 큰사랑은 사랑방과 마루, 마루 뒤편의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공간은 안방이 중앙에 있고 대청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대청 앞에 상방이 있고, 안방의 왼편에 부엌과 고방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18세기에 지어진 안동 지역의 상류 주택에서 간혹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이다. 안방과 왼쪽 날개 부분의 공간 상부에는 사면에 채광과 환기를 위한 창을 단 큰 규모의 통다락을 두어 안채가 다른 건물에 비해 높다.

사당은 본채 동쪽에 축대를 높게 쌓은 후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구획해 배치하였다. 초가지붕을 올린 아래채 건물은 창고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수정

성성재종택은 조선시대의 학자 성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 1530~1604) 가문의 종택이다. 종택이란 한 문중에서 맏이로 이어 온 가족이 대대로 사용해온 집을 말한다. 정확한 건축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건물은 18세기 무렵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난수는 안동 예안면 출신으로, 명종 16년(1561) 생원시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은거하며 노모를 모셨고,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안동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종택은 ‘ㅁ’자형의 본채, 사당, 아래채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의 앞면에는 중문을 기준으로 좌우에 작은사랑과 큰사랑을 배치했으며, 건물 전면에 툇마루를 달았다. 큰사랑은 사랑방과 마루, 마루 뒤편의 책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안방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부엌과 고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대청과 상방이 있다. 안방을 중앙에 두는 이러한 구조는 18세기 안동 지역의 상류 주택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형태이다. 안방과 부엌 위쪽에는 높은 다락을 두었고, 채광과 환기를 위한 창을 달았다.

사당은 본채 오른쪽에 축대를 높게 쌓은 후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구획하였다. 초가지붕을 올린 아래채는 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