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수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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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수애(水涯) 류진걸(柳辰杰)이 지은 집이다. 류진걸의 호로써 당호를 삼았다. 수애당은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남향인 우측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담장으로 구획된 장방형의 행랑마당이 나타나며, 담장 사이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정침과 ‘ㄱ’자형의 고방채가 안마당을 두고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문채는 외양간과 창고를 두고 통칸 온돌방을 두었다. 고방채는 12칸 규모의 건물로 창고, 고방, 화장실, 부엌, 온돌방이 연결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인 팔작기와집이다. 좌로부터 부엌, 안방, 웃방, 대청, 중간방, 사랑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안방 뒤에는 우물마루로 된 방을 두었다. 목재는 모두 춘양목(春陽木)으로 지어져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조선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87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정 국문

초고

이 건물은 수애(水涯) 류진걸(柳辰杰)이 1939년에 지은 집이다. 류진걸의 호로써 당호를 삼았다. 처음 임동면 수곡동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수몰 지구에 들어가자 198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 집은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담장으로 구획된 장방형의 행랑마당이 나타나며, 담장 사이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정침과 ‘ㄱ’자형의 광이 있는 고방채(庫房채, 광이 있는 집채가 안마당을 두고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문채는 외양간과 창고를 두고 통칸 온돌방을 두었다. 고방채는 12칸 규모의 건물로 창고, 고방, 화장실, 부엌, 온돌방이 연결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인 팔작기와집이다. 좌로부터 부엌, 안방, 웃방, 대청, 중간방, 사랑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안방 뒤에는 우물마루로 된 방을 두었다.

평면 구성상 방의 크기가 제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은 기둥을 중앙에 두지 않음으로써 생긴 반 칸을 활용하여 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보존 상태가 좋으며 조선 말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건축에 쓰인 목재는 모두 춘양목(春陽木)으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1차 수정

수애당은 독립운동가 수애 류진걸(水涯 柳震傑, 1899~?)이 1939년에 지은 집이다. 임하댐 건설로 1987년 원래의 위치에서 200m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수애당이 위치한 수곡리는 1550년 무렵 류성(柳城, 1533~1560)이 정착한 이후 전주류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류진걸은 1922년 중앙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 조선민중대회에서 관동대지진으로 학살된 동포를 추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일본 최대 건설회사인 대창토건에서 근무하였으며, 나진·선봉 항만, 동해남부선 등 당시 우리나라의 대형 건설사업에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수애당은 대문채, 정침, 고방채 등 총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채는 외양간과 창고를 두고 통칸 온돌방을 두었다. 고방채는 창고, 고방, 화장실, 부엌, 온돌방이 연결되어 있다. 정침은 팔작기와집으로, 왼쪽에서부터 부엌, 안방, 웃방, 대청, 중간방, 사랑방이 있으며 안방 뒤에는 우물마루로 된 방을 두었다. 수애당에 쓰인 목재는 소나무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겨지는 춘양목(春陽木)으로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현재 류진걸의 손자 부부가 전통 한옥스테이로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