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삼구정
2022년 국문집필
기존 국문
이 건물은 조선 연산군(燕山君) 2년(1496)에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80여세 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고자 건립한 것으로 여러 차례 보수와 중건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삼구정이란 거북이 모양의 돌이 3개가 있어서 붙인 것으로 거북은 십장생 중의 하나이므로 어머님이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전체에 우물마루를 놓았다. 이 건물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중수와 중건을 거치면서 조금 훼손되었지만 대부분 변함 없이 유지되어 조선 초기 정자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정 국문
초고
이 정자는 김영수(金永銖, 1446~1502)와 그의 형제들이 늙으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처음 지은 것이다.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1947년 지금의 정자 건물이 다시 지어졌다.
정자가 있는 소산마을은 안동김씨의 집성촌으로, 김영수는 안동 김씨 가운에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의 손자이다.
정자는 네 면을 모두 개방해 마을을 비롯한 주변 경치가 한눈에 보이도록 했으며, 전체에 우물마루를 시설했다.
정자의 이름은 뜰에 있는 3기의 바위가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 거북이의 모습과 비슷해 보이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면서 이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 예천 권씨는 여름철이 되면 집에서 나와 이 언덕의 나무그늘에서 쉬기를 즐겨했다. 이를 본 아들들이 힘을 모아 88세의 노모를 위해 1496년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
- 현판의 글씨는 이종준(?-1499)이 썼고, 당시 문장으로 이름났던 성현(1439-1504)이 기문을 남겼다.
- 허백당 성현(1439∼1504)이 쓴 삼구정 기문에, 형제들이 효자로 이름난 노래자(老萊子)처럼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피워 노모를 즐겁게 해 드린 광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 뜰에 있는 3기의 바위들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로 추정하기도 하며, 지금은 ‘삼구석’이라고 부른다.
- 용재 이종준이 쓴 편액을 비롯해 이곳에 걸려 있던 현판 34점의 원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
- 김영수의 후손인 김상헌은(안동김씨 장동파의 파조가 된 김영수의 둘째 아들 김번이 김상헌의 증조부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소산마을에 들어왔고, 이 때 이 정자에 올라 주변 경관 중 8곳을 꼽아 ‘삼구정 팔경’을 정하기도 했다.
1차 수정
삼구정은 조선시대의 무신 김영수(金永銖, 1446~1502)와 그의 형제들이 어머니 예천권씨를 위해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지은 정자이다. 삼구정이 있는 소산마을은 안동김씨의 집성촌으로, 김영수는 안동김씨 가운에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의 손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세 마리의 거북이”라는 뜻으로 정자 왼쪽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세 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이는 전통적으로 장수를 상징하므로 어머니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아들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의 정자 건물은 1947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사방이 모두 트여 마을을 비롯한 주변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안에 걸린 삼구정 현판은 안동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종준(李宗準, ?~1499)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