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고성 사직단
2020 안내문안 초안 작성 지원 사업
기존 국문
없음.
수정 국문
초고
고성읍 교사리에 있는 조선시대 사직단이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농경사회인 조선에서 신성하게 여겼던 공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고성현에는 고성의 사직단이 “현(縣)의 서쪽에 있다.”고 했으며, 이후 조선 후기에 발행된 『고성현읍지』와 『경상도읍지』 등도 “현의 서쪽 5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1893~1894년 고성부사 오횡묵(吳宖默)의 일기 『고성총쇄록(固城叢瑣錄)』에는 고성부사가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의 제물과 제관, 날씨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고성 사직단이 있는 교사리(校社里)의 지명은 향교가 있던 교동(校洞)과 사직단이 있던 사동(社洞)에서 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2017년 조사결과, 동서 약 5m, 남북 약 4.2m의 제단과 이를 둘러싸는 20여m의 담장, 남쪽의 출입구 등이 확인되었다.
- <고성신문>에 의하면 2019년 당시 복원 계획 중인데, 현재 복원 중인지 확인 필요.
1차 수정
사직단은 과거 농경사회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나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던 곳이다. 사직단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사직단을 건립하여 봄과 가을에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300여 개의 사직단이 존재하였으나,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부분이 철폐되었다.
고성 사직단은 당시 관아가 있던 읍치(邑治)의 서쪽, 해발 32m의 낮은 봉우리에 위치하였다. 2017년 조사 결과, 동서 길이 약 5m, 남북 길이 약 4.2m의 제단, 제단을 감싼 약 1m 높이의 담장, 담장 남쪽의 출입구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 교사리(校社里)의 지명은 향교가 있던 교동(校洞)과 사직단이 있던 사동(社洞)에서 온 것이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조선시대에는 전국의 행정단위마다 사직단을 건립하여 →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사직단 외에 전국의 고을에 사직단을 건립하여
- 수정이유: ‘행정단위’라고 하면 나라의 사직단을 포함하는지 모호할 뿐 아니라, 道, 鎭, 驛 등도 행정단위로 볼 수 있음.
- 분야별 자문위원 2
- 수정사항 없음.
- 읽기쉬운문안 자문위원
- 현재 이곳 교사리(校社里)의 지명은 향교가 있던 교동(校洞)과 사직단이 있던 사동(社洞)에서 온 것이다.(->사동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2차 수정
사직단은 과거 농경사회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나라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던 곳이다. 사직단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사직단 외에 전국의 고을에 사직단을 건립하여 봄과 가을에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300여 개의 사직단이 존재하였으나,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부분이 철폐되었다.
고성 사직단은 당시 관아가 있던 읍치(邑治)의 서쪽, 해발 32m의 낮은 봉우리에 위치하였다. 2017년 조사 결과, 동서 길이 약 5m, 남북 길이 약 4.2m의 제단, 제단을 감싼 약 1m 높이의 담장, 담장 남쪽의 출입구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 이곳 교사리(校社里)의 지명은 향교가 있던 교동(校洞)과 사직단이 있던 사동(社洞)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