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거제 지세포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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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국문
이 성은 1490년(성종 21)에 수군 만호진(水軍 萬戶鎭)으로 처음 쌓았으며, 1545년(인종원년)에 왜구(倭寇)의 침입을 우려하여 영남지역의 6개 군에서 2만5천여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다시 쌓았다. 임진왜란때 이곳의 책임자였던 강지욱(姜志昱)이 왜장(倭將) 가토 기요미사(加藤淸正)와 싸우다가 패하고, 성이 함락되었다. 1604년(선조37)에 수군 만호진이 옥포의 조라포(助羅浦)로 옮겨가자 이 성은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651년(효종2)에 만호진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지세포 동쪽 끝의 선창마을 뒷산 계곡으로부터 바다로 튀어나온 곳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성을 쌓았는데, 타원형으로 이루어진 성에는 동·서·남쪽 세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하였다. 성문위에는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雉城,성가퀴)을 만들었으며, 동쪽 성문 입구에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瓮成)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완전히 엄폐하였다. 그리고 성벽 바깥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위해 도랑(垓字)을 설치하였다. 바깥족 벽은 맨땅 위에 자연석으로 받침돌을 놓고 그 위에 성벽을 올렸는데, 전체적인 조형 양식은 조선 전기의 수법이다.
성의 규모는 둘레 330m, 높이 4m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300m정도의 성벽이 1.5m높이로 남아 있다. 성의 입구에는 수군 만호진이 있었음을 전해주는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 (바깥족 -> 바깥쪽 瓮成 -> 甕城)
수정 국문
초고
이 성은 조선시대 성종 21년(1490)에 방어를 목적으로 수군진(水軍鎭)에 쌓은 성이다.
이 곳 지세포진(知世浦鎭)은 거제부 소속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만호인 강지욱(姜志昱)이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옥포성(玉浦城) 밖으로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을 피했다가 바다가 잠잠해지면 대마도로 떠났다고 한다.
돌을 쌓아 성벽을 마련하였으며 성의 동쪽은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논밭의 축대나 가옥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성루(城樓)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 안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외는 논밭이며, 성 밖 역시 논밭과 임야로 되어 있다.
1차 수정
지세포진성은 조선시대인 성종 21년(1490)에 방어를 목적으로 수군진(水軍鎭)에 돌로 쌓은 성이다.
지세포진은 거제부 소속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만호인 강지욱(姜志昱)이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옥포성 밖으로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을 피했다가 바다가 잠잠해지면 대마도로 떠났다고 한다.
성의 동쪽은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논밭의 축대나 가옥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성루(城樓)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 안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외는 논밭이며, 성 밖 역시 논밭과 임야로 되어 있다.
자문의견
- 분야별 자문위원 1
- 수군진(水軍鎭)
- -> 설명 필요
- ~~성 밖 역시 논밭과 임야로 되어 있다. 지금은 300m정도의 성벽이 1.5m높이로 남아 있다. 성의 입구에는 수군 만호진이 있었음을 전해주는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 -> 수정문안 맨마지막 단락에 내용 첨가하기
- 분야별 자문위원 2
- 지세포진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1490년(성종 21)에 둘레 1605척, 높이 13척 규모로 쌓은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진성이다.
- 지세포진에는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만호인 강지욱(姜志昱)이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1604년(선조 37) 옥포 북쪽 조라포로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 성의 입구에는 수군 만호진이 있었음을 전해주는 비석(碑石)이 세워져 있다.
- 지세포진성의 전체적인 성벽 선은 위에서 보았을 때 타원형을 이룬다. 성벽은 석축으로 원래 둘레 330m, 높이 4m 정도였으나 지금은 둘레 300m 정도의 성벽이 1.5m 정도 높이로 남아 있다. 동·서·남 세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동문지의 경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덧댄 옹성(甕城)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 곳곳에는 성벽에 붙어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네모꼴로 성벽에 덧대어 쌓은 치성(雉城)도 보인다. 그리고 성벽 바깥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용 도랑인 해자(垓子)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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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 * 수정의견 >
- 1. 무엇으로부터 방어인지 명확히 해주는 것이 좋을 듯
- 2. 구어체가 아니므로 시각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문장부호로 깔끔하게 정리...
- 3. 현재 상태를 설명하는 것 보다 우선적으로 지세포진성을 알게 해주는 흔적 등을 설명하는 게 더 중요해보임
- 지세포진성은 조선시대 성종 21년(1490), 왜구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수군진(水軍鎭)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 지세포진은 거제부 소속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만호인 강지욱(姜志昱)이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 옥포성 밖으로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을 피했다가 바다가 잠잠해지면 대마도로 떠났다고 한다.
- 성의 입구에는 수군 만호진이 있었음을 전해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성의 동쪽은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많이 훼손되어 현재는 논밭의 축대나 가옥의 담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성문을 두고, 그 사이사이에 망을 보기 위한 성루(城樓)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성 안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외는 논밭이며, 성 밖 역시 논밭과 임야로 되어 있다.
2차 수정
지세포진성은 경상우수영 소속의 수군진성으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종 21년(1490)에 쌓았다.
지세포진은 거제부 소속으로 종4품의 무관인 만호(萬戶)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만호인 강지욱(姜志昱)이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군대와 싸우다가 패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선조 37년(1604) 옥포 북쪽 조라포로 옮겼다가 효종 2년(1651)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갈 때 반드시 이곳에서 바람을 피했다가 바다가 잠잠해지면 대마도로 떠났다고 한다.
지세포진성은 위에서 보았을 때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룬다. 성벽은 원래 둘레 330m, 높이 4m 정도였으나 지금은 둘레 300m 정도의 성벽이 1.5m 정도 높이로 남아 있다. 동·서·남쪽 세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하였는데 동문지의 경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덧댄 옹성(甕城)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 곳곳에는 성벽에 붙어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네모꼴로 성벽에 덧대어 쌓은 치성(雉城)도 보인다. 그리고 성벽 바깥쪽에는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어용 도랑인 해자(垓子)도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