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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최윤덕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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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최윤덕 유허지
창원 최윤덕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창원 최윤덕 유허지
한자 昌原 崔潤德 遺墟址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1096일대
지정(등록) 종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
지정(등록)일 1995년 5월 2일
분류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탄생지
관리자 창원시
수량/면적 2,840㎡
웹사이트 창원 최윤덕 유허지,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기존 국문

이곳은 조선 초기의 무인(武人)으로서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제압하고 , 남쪽으로는 왜구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최윤덕(崔潤德, 1376~1455) 장군의 유허지이다. 지금은 논과 과수원으로 변해 버렸으나, 정승골이라는 지명과 함께 주변에서 발견된 주춧돌과 기와 조각, 우물터 등은 이곳이 장군의 유허지 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장군은 무인이었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던 장군은 어느 날 소의 먹이를 베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활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1410년(태종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1419년(세종 1)에는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후에는 북방의 여진족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정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장군의 묘는 대산리 사리마을 뒷산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 바로 아래에 있다.

수정 국문

초고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내곡리에 위치한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생가터이다.

최윤덕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통천(通川), 호는 임곡(霖谷), 시호는 정열(貞烈)이다. 아버지 지중추부사 최운해(崔雲海)와 어머니 창원이씨(昌原李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19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 1년(1419)에 삼군도통사가 되어 이종무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세종 15년(1433)에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대파하였다. 이후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이 곳은 집터의 축대로 추측되는 돌을 쌓은 흔적과 우물이 있던 자리가 보이고, 기와 등의 조각이 출토되어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다. 사랑채라고 전해지는 곳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고, 사랑채의 축대는 밭둑으로 사용되고 있다.

1차 수정

최윤덕 유허지는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고 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년에는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생가 터로 여겨지는 곳에는 집터의 축대로 추측되는 돌을 쌓은 흔적과 우물이 있던 자리가 있고,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2010년 최윤덕을 기려 동상을 세웠다.

자문의견

  1. 분야별 자문위원 1
    • 태종 10년(1410)년에 --> 년 반복 삭제
    •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무반 집안이었다
    • 동북면 --> 동북지역
    •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 세종 재위 시절에는
    • 세종 27년(1445)년에는 --> 년 반복 삭제
    • 수정본:
      최윤덕 유허지는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집안은 무신 가문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를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고 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시절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에는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생가 터로 여겨지는 곳에는 집터의 축대로 추측되는 돌을 쌓은 흔적과 우물이 있던 자리가 있고,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2010년에는 최윤덕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2. 분야별 자문위원 2
    • "최윤덕의 생가 터로 여겨지는 곳에는 ~ 최윤덕을 기려 동상을 세웠다." 삭제 후 -> 이 곳에는 집터의 축대로 추측되는 돌을 쌓은 흔적과 우물이 있던 자리가 있고,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나 출생과 관련 근거가 명확지 않다.
  3. 읽기 쉬운 문안 자문위원
    • 최윤덕 유허지는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논과 과수원으로 변해 버렸으나, 정승골이라는 지명과 함께 주변에서 발견된 주춧돌과 기와 조각, 우물터 등은 이곳이 장군의 유허지 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2010년 최윤덕을 기려 동상을 세웠다.
      최윤덕 장군은 창원 출신으로 역시 무인으로 이름 높았던 최운해(崔雲海, 1347~1404)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소의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으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태종 10년(1410)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세종1년(1419)에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이종무(李從茂, 1360~1425)와 함께 대마도(對馬島 : 쓰시마)를 정벌하여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년에는 궤장(几杖 :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 <검토의견>최윤덕 생가지 논란은 새로운 의견이 특별한 근거가 없는한, 정리될 때까지는 이전 것을 따라야 함.

2차 수정

최윤덕 유허지는 조선 전기의 명장인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전해진다.

최윤덕은 창원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를 이은 무반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죽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태조 3년(1394) 소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태종 10년(1410)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당시 여진족이 점거하고 있던 동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이후 세종(1418~1450 재위) 대에는 쓰시마정벌과 북방 개척 등을 주도하며 왕의 신임을 얻었다. 무장임에도 세종 17년(1435) 최고의 문반직인 좌의정에 올랐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변방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지체 없이 나섰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세종 27년(1445)에는 궤장(几杖, 임금이 나라에 큰 공로를 세운 대신에게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을 받아 신하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윤덕의 생가터로 여겨지는 곳은 집터의 축대로 추측되는 돌을 쌓은 흔적과 우물이 있던 자리가 있고 기와와 자기 조각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최윤덕을 기려 동상을 세웠다.

문맥요소

Nodes

ID Class Label Description
창원_최윤덕_유허지 Place 창원_최윤덕_유허지 주춧돌과 기와 조각, 우물터 등이 출토되어 최윤덕의 생가터로 추정하고 있다
최윤덕 Actor 최윤덕(崔潤德,1376~1445)
통천최씨 Actor 통천최씨(通川崔氏)
통천_상렬사 Place 통천_상렬사 통천의 상렬사와 안주의 청천사에 제향되었다.
세종_묘정 Place 세종_묘정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안주_청천사 Place 안주_청천사 통천의 상렬사와 안주의 청천사에 제향되었다.
J38-0145-0000 Place (경상남도_기념물_제145호)창원_최윤덕_유허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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