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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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Ganjae Head House of the Wonju Byeon Clan and Ganjaejeong Pavilion
원주변씨간재종택및간재정,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표명칭 원주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영문명칭 Ganjae Head House of the Wonju Byeon Clan and Ganjaejeong Pavilion
한자 原州邊氏 簡齋宗宅 및 簡齋亭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720-30
지정(등록) 종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1호
지정(등록)일 2003.12.15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수량/면적 5동
웹사이트 원주변씨간재종택및간재정,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해설문

국문

2016

조선 중기의 학자인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75~1660)의 종택과 정자이다. 종택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직후 변희예(邊希乂)․변희리(邊希李) 형제가 금계에 입향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종택과 정자는 19세기 전후한 시기의 건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종가의 품위와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산골짜기에 정침 및 별당, 사당, 정자가 위로부터 자연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기 기능에 적합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구비한 드문 사례에 해당된다.

변중일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의 휘하에서 종사하는 등 국난 극복에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1686년(숙종 12)에 나라에서 특별히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하였다. 한 사람이 충과 효를 겸비하여 정려를 받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2021

간재종택은 조선시대의 학자 간재 변중일(簡齋 邊中一, 1575~1660) 가문의 종택이고, 간재정은 종택 뒷산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이다.

변중일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며 공을 세웠고, 집까지 쳐들어온 왜병도 그의 효심에 감탄해 조모와 모친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할 만큼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나라에서는 그의 행적을 인정해 숙종 12년(1686)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한 사람이 충과 효를 겸비하여 정려를 받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종택은 18세기 전후한 시기의 건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 날개채로 연결한 정침(正寢), 별당, 사당, 정자인 간재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당은 종택 뒤편 동쪽에 담을 쌓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만년에 임진왜란으로 인한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11년(1874)에 중건한 것이다. 산을 평평하게 깎아 만든 터 위에 지어진 건물은 중앙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건물 전면에 난간을 두른 마루를 덧달아 누마루 형식으로 꾸몄다.

영문

  • Ganjae Head House of the Wonju Byeon Clan and Ganjaejeong Pavilion

2016

This is the head house of the family of Byeon Jung-il (1575-1660), a scholar of the mid-Joseon period. A head house is the home where the family of the eldest male descendants of a lineage lives. The exact construction period of this house is unknown, but it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after the Literati Purge of 1498, as Byeon Hui-ye and Byeon Hui-ri, the ancestors of Byeon Jung-il, came back to their hometown in Geumgye-ri right after the incident.

The head house and Ganjaejeong Pavilion in the complex demonstrate the typical architectural style of the 19th century and dignified elegance of an upper-class house. The complex is composed of a main quarters, a detached quarters, a shrine, and a pavilion, all of which are located in an optimal position, creating harmonious beauty along with the surrounding natural landscape.

Byeon Jung-il was known for his filial piety to his parents from childhood, and after the outbreak of the Imjin War (1592-1598), he joined the civilian army to dedicate himself to the restoration of national security. In recognition of his virtuous deeds, a commemorative plaque was bestowed by the royal court in 1686. It is rare for a person to be granted a commemorative plaque both for filial piety and loyal devotion.

2021

This house is the head house of the scholar Byeon Jung-il (1575-1660, pen name: Ganjae). A head house is a residence passed down among the male successors of a family lineage. On the hill behind the head house is an auxiliary pavilion named Ganjaejeong.

Byeon Jung-il served as a civilian soldier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He was also well-known as a filial son. When the Japanese soldiers raided his home, they were moved by his filial piety and thus spared his mother and grandmother from harm. In 1686, he was posthumously bestowed with commemorations both for his patriotic loyalty and his filial devotion.

The house consists of a living quarters, a detached quarters, and an ancestral shrine. It is unknown when it was built, but its architectural style suggests that it dates to the 18th century. The living quarters consists of a men’s quarters in the front, a women’s quarters in the back, and a wing to each side that all together form a square layout with a courtyard in the middle. The shrine is located behind the living quarters to the right and is surrounded by its own enclosure wall.

Ganjaejeong Pavilion was first established by Byeon Jung-il in his later years to be used as a place for his studies. The current building dates to 1874. It consists of a wooden-floored hall in the center with an underfloor-heated room to each side. Along the front is a wooden veranda with balustrades.

영문 해설 내용

2021

간재종택은 학자 변중일(1575-1660, 호: 간재) 가문의 종가가 대대로 사는 집이다. 종택 뒤편 언덕 위에는 부속 정자인 간재정이 있다.

변중일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효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집에 쳐들어온 왜병들이 그의 효심에 감탄해 조모와 모친을 해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686년에는 그의 충절과 효행을 기리는 정려가 내려졌다.

종택은 정침, 별당,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알 수 없고, 18세기 무렵의 건축양식이 주로 보인다. 정침은 앞쪽의 사랑채, 뒤쪽의 안채, 좌우 익사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을 이룬다. 사당은 종택 뒤편 오른쪽에 담을 쌓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만년에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874년에 중건하였다. 중앙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앞면에 난간을 두른 마루를 덧달았다.

참고자료

  • 원주변씨 간재종택 및 간재정,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443701310000&pageNo=1_1_1_1 -> 이 건물은 조선중기의 학자인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75~1660)의 종택과 정자이다. 종택의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직후 변희예(邊希乂), 변희리(邊希李) 형제가 금계에 입향한 것으로 보아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종택과 정자는 19세기 전후한 시기의 건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종가의 품위와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산골짜기에 정침 및 별당ㆍ사당ㆍ정자가 위로부터 자연지형에 순응하면서 각기 기능에 적합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구비한 드문 사례에 해당된다. 변중일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뛰어났으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의 휘하에서 종사하는 등 국난 극복에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해 1686년(숙종 12)에 나라에서 특별히 정충효각(旌忠孝閣)을 하사하였다. 한 사람이 충과 효를 겸비하여 정려를 받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이다.
  • 원주변씨 간재 종택 및 간재정,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0927 -> 간재 종택은 변중일의 아호인 간재를 따 이름 붙였으며, 간재정은 변중일이 만년에 지은 정자로 임진왜란의 울분을 달래고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원주변씨 간재 종택이 있고 종택 뒷산 언덕 위에 간재정이 있다. 골짜기 맨 아래쪽에 남서향한 원주변씨 간재 종택이 크게 일곽을 이루면서 자리 잡고, 그 뒤편 우측에 사당이 서향으로 놓여 있다. 사당 좌측 골의 맨 위쪽 전망 좋은 곳에 간재정이 남서향으로 자리한다. 원주변씨 간재 종택은 1796년(정조 20)에 지은 것이라 하나 1949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 이외에는 건축 연대를 확인할 수 없다. 간재정은 변중일이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초반이나 중반경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의 건물은 1874년(고종 11) 변중일의 8세손인 변석찬(邊錫瓚)·변석하(邊錫夏) 등이 중건한 것이다. / 원주변씨 간재 종택의 사랑채 전면 좌측에는 ‘무민당(无憫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팔작지붕과 홑처마인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건물이 있는데, 좌측 2칸은 온돌방이고 우측 1칸은 마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원주변씨 간재 종택 뒤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맞배지붕에 홑처마인 사당이 있다.
  • 원주변씨, 디지털안동문화대전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121 -> 변안열의 현손 부사직 변희예가 무오사화 때 동생과 함께 낙향하여 영주 화천에 정착하였다가 아들 변광이 안동 금계촌(현 서후면 금계리)에 살던 판서 권철경(權哲經)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금계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변광의 아들 동호(東湖) 변영청(邉永淸, 1516~1580)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9년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부사, 대구부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장문보(張文輔)와 함께 화남삼절이라 일컬어진 인물이다. 변영청의 아들 변경장(邉慶長)은 153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변경장의 맏아들 변희일(邉喜一)은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 동생 변중일과 함께 가산을 털어 군량미 1백 섬을 마련하여 상주 진영으로 보내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진위장군 충순위첨지에 제수되었다. 간재(簡齋) 변중일(邉中一, 1583~1660)은 형 변희일과 함께 곽재우(郭再祐) 의병진에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효행으로도 널리 알려져 1686년(숙종 12) 충효각(忠孝閣)이 세워졌다.
  • 20. 충과 효의 상징 간재 종택과 동호정, 경북매일, 2020.7.28.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52340 -> 다른 종택과는 다르게 충과 효를 상징하는 정려각과 홍살문이 시선을 끈다. 간재 변중일(1575~1660)은 동호 변영청의 손자로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 때 병든 조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은 왜병이 병간호 잘하라며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게 징표로 칼을 주고 간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받았다. 군량미 100석을 상주 진영으로 보내고 18세의 어린나이에 형 변희일과 곽재우 의병장 아래서 왜적과 싸웠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으로 왜적과 싸워 충과 효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 [종가] 26. 원주변씨 간재종택, 경북일보, 2016.8.1.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7015 -> 변중일 효심 관련 일화 2가지
  • 안동 봉정사 인근 원주변씨 간재종택을 찾아가다, 하회래프팅과 하회체험,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sinjaesu/220332001917 -> 현장 답사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