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청당 송유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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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청당송유묘표
Tombstone of Song Yu
쌍청당송유묘표,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쌍청당송유묘표
영문명칭 Tombstone of Song Yu
한자 雙淸堂宋愉墓表
주소 대전광역시 동구
지정(등록) 종목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지정(등록)일 2021년 7월 19일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쌍청당송유묘표,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쌍청당 송유 묘표는 송유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쌍청당은 송유의 당호(堂號)로 세종 때 아악(雅樂)을 정리한 박연이 지어준 것이며,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대전을 대표하는 사족(문벌이 좋은 집안) 중 하나인 은진 송씨가 회덕에 정착한 것은 송유의 조부인 송명의 때부터이지만,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 회덕의 송씨)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송유 때부터이며, 송촌(宋村)이라는 지명도 이 무렵부터 불렸다.

형태는 크고 높은 받침돌을 놓고 비석을 세웠는데, 받침돌의 윗부분에는 여러 겹의 연꽃잎을 새기고, 옆면에는 줄에 꿴 구슬 모양의 장식과 상다리(床다리)와 같은 문양을 새겨 넣었다.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 위에는 팔작지붕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한 가첨석*을 올렸다.

17세기에 세워진 이 묘표의 비문은 김상헌이 지었고, 글씨는 김집이 썼다. 두전**은 송준길의 글씨이다. 비석에는 500여 명에 이르는 자손이 친손과 외손의 구분 없이 기록되었는데, 이처럼 방대한 인원을 수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친손과 외손이 모두 기록된 것은 가부장제가 강화되기 전인 17세기 이전의 전통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가첨석(加檐石): 비석 위에 덮어 얹은 지붕 모양의 돌
  • 두전(頭篆):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

영문

Tombstone of Song Yu

This stele was erected in the 17th century to record the life of Song Yu (1388-1446), a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Song Yu was born in Hoedeok (present-day Daejeon). From his youth, he was well known for his integrity, filial piety, academic achievement, and virtuous deeds. He briefly became a government official, but resigned and returned to his hometown where he devoted himself to studying. The Eunjin Song clan, to which Song Yu belonged, had settled in Hoedeok since the time of Song Yu’s grandfather Song Myeong-ui. The clan formed such a deep connection with the local society that, by the time of Song Yu, the clan had come to be known as Hoesong, meaning the “Song [Clan] of Hoedeok.” The village where Song Yu lived was also called Songchon meaning “Village of the Song [Clan].”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as composed by Kim Sang-heon (1570-1652) and calligraphed by Kim Jip (1574-1656). The name of the tombstone was calligraphed by the renowned civil official Song Jun-gil (1606-1672), who was also one of Song Yu’s descendants. The tombstone records the names of about 500 of Song’s descendants, which is an extremely high number of people to be listed on a monument. Furthermore, the descendants listed include those of both his sons and his daughters. This reflects the tradition of recognizing both male and female descendants, which was practiced until the late 17th century when patrilinealism began to be reinforced.

The tombstone consists of a large and tall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top of the pedestal is decorated with lotus petal designs, while the sides are decorated with beaded string and dining table leg designs. The capstone is shaped like a hip-and-gable roof and is carved with great detail.

Short Version

This stele was erected in the 17th century to record the life of Song Yu (1388-1446), a scholar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The Eunjin Song clan, to which Song Yu belonged, had settled in Hoedeok (present-day Daejeon) since the time of Song Yu’s grandfather Song Myeong-ui. The clan formed such a deep connection with the local society that, by the time of Song Yu, the clan had come to be known as Hoesong, meaning the “Song [Clan] of Hoedeok.”

The inscription on the tombstone was composed by Kim Sang-heon (1570-1652) and calligraphed by Kim Jip (1574-1656). The name of the tombstone was calligraphed by the renowned civil official Song Jun-gil (1606-1672), who was also one of Song Yu’s descendants. The tombstone records the names of about 500 of Song’s descendants, which is an extremely high number of people to be listed on a monument.

The tombstone consists of a large and tall pedestal, a body stone, and a capstone. The top of the pedestal is decorated with lotus petal designs, while the sides are decorated with beaded string and dining table leg designs. The capstone is shaped like a hip-and-gable roof and is carved with great detail.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학자 송유(1388-1446)의 행적을 기록하여 17세기에 세운 비석이다.

송유는 회덕(지금의 대전 지역)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과 덕행으로 잘 알려졌다. 잠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송유가 속한 은진송씨가 회덕에 정착한 것은 송유의 할아버지인 송명의 때부터이지만, 송유 대에 이르러 은진송씨는 “회덕의 송씨”라는 뜻의 “회송”이라 불릴 정도로 지역 사회와 깊은 연고를 갖게 되었다. 송유가 살던 마을은 “송씨 마을”이라는 뜻의 “송촌”이라고도 불렸다.

이 비석은 김상헌(1570-1652)이 비문을 짓고 김집(1574-1656)이 글씨를 썼다. 비의 이름은 저명한 문신이자 학자이고 송유의 후손인 송준길(1606-1672)이 썼다. 비석에는 약 500여 명에 이르는 후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방대한 인원의 명단이 비석에 기록된 것은 매우 드문 사례이다. 또한 친손과 외손이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가부장제가 강화되기 전인 17세기 이전의 전통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석은 크고 높은 받침돌,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의 윗부분에는 연꽃잎 문양, 옆면에는 줄에 꿴 구슬 문양과 상 다리 문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팔작지붕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