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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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Stele of Buddhist Monk Byeogam at Beopjusa Temple, Boeun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영문명칭 Stele of Buddhist Monk Byeogam at Beopjusa Temple, Boeun
한자 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
주소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209번지
지정(등록) 종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지정(등록)일 1980년 11월 13일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이 비석은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시대 중기의 고승인 벽암대사(1575∼1660)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5년(1664) 5월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정두경이 지었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

커다란 암석 위에 홈을 파서 세웠으며 규모는 높이 213cm, 폭 110cm, 두께 35cm 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선승이며 승병장(僧兵將)인 벽암대사는 임진왜란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8도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천명을 모은 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영문

Stele of Buddhist Monk Byeogam at Beopjusa Temple, Boeun

This stele commemorates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Monk Byeogam (1575-1660).

Byeogam became a Buddhist monk at the age of 10. He visited many sacred mountains and devotedly practiced the teachings of the Buddha.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he took part in naval battles as a general in command of monk-soldiers. In 1624, monk-soldiers led by Byeogam were mobilized by the royal court in the construction of Namhansanseong Fortress, which was completed in just three years. In the following years, he oversaw the reconstruction of several Buddhist temples, namely Hwaeomsa Temple, Ssanggyesa Temple, and Songgwangsa Temple. During the Manchu invasion of 1637, he mobilized a civilian army. In 1646, Byeogam came to Beopjusa Temple where he stayed for several years.

This stele was erected in 1664. The epitaph on the stele was composed by the civil official and skillful writer Jeong Du-gyeong (1597-1673) and was calligraphed by Yi U (1637-1693), a grandson of King Seonjo (r. 1567-1608).

영문 해설 내용

이 비는 조선시대의 승려인 벽암대사(1575-1660)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탑이다.

벽암은 10세에 출가하였고, 여러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에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장으로 해전에 참여하였고,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자 승군을 이끌고 가 3년 만에 성을 완성하였다. 이후 화엄사, 쌍계사, 송광사 등 여러 사찰을 중수하였고, 1637년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1646년부터는 법주사에 머물며 수행에 정진하였다.

이 탑비는 1664년에 세웠으며, 비문은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정두경(1597-1673)이 짓고 글씨는 선조(재위 1567-1608)의 손자인 서화가 낭선군 이우(1637-1693)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