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관수선생 고택
백관수선생고택 Baek Gwan-su’s Hou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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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백관수선생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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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Baek Gwan-su’s House |
한자 | 白寬洙先生古宅 |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도덕길 58 (덕산리) |
지정(등록) 종목 |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 |
지정(등록)일 | 1997년 7월 18일 |
분류 | 유적건조물/인물사건/인물기념/생활유적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면적 | 일곽655㎡ |
웹사이트 | 백관수선생 고택,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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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문
국문
독립운동가 근촌 백관수(芹村 白寬洙, 1889∼1961)가 살았던 집이다. 그는 일찍이 간재 전우에게 유학을 배웠으며, 청년 시절부터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과 교유했다. 일본 유학 중 조선 독립을 위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귀국하여 동아일보 사장을 맡았으며,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에 합류하여 제헌국회 의원을 지내면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관여했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 납치되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로 이루어진 중농 규모의 남부지방 민가이다. 경사진 땅에 석축을 쌓고 안채를 남향으로 배치하였으며,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서쪽에는 지붕을 나란히 맞대고 있는 3칸의 곳간채가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옆면 2칸의 一자집이다. 부엌 옆으로 2칸의 방이 있고, 이어서 건넌방과 그 앞에 마루방이 있는 구조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옆면 2칸으로 一자집이다. 동쪽에서부터 대문간과 사랑대청을 배치하였으며, 그 옆에는 2칸의 방을 두었는데 그 앞뒤로 모두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근처에는 수원 백씨 문중 사당인 덕산사(德山祠)가 있고, 그 뒤로 백관수 가묘(假墓)*가 있다.
- 가묘: 시신을 찾을 수 없어 시신 없이 임시로 쓰는 묘
영문
Baek Gwan-su’s House
This house was the residence of Baek Gwan-su (1889-1961), an independence activist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Deoksan-ri Village, where this house is located, has been a clan village of the Suwon Baek Clan, to which Baek Gwan-su belonged, for generations.
Baek Gwan-su, who was born in this village, studied as a disciple of Jeon U (1841-1922), a renowned scholar at that time. He graduated from Gyeongseong Law College in 1915 and enrolled at the Department of Law of Meiji University in 1917. During his studies in Japan, he established the Korean Youth Independence Corps for Korea’s independence. On February 8, 1919, he proclaimed Korea’s independence together with other Korean students in Tokyo and was subsequently captured by Japanese police and put in jail for one year. After he came back to Korea in 1924, he worked at the Chosun Ilbo Newspaper, after which he participated in various independence movements and national movements. In 1937, he was appointed as president of the Dong-a Ilbo Newspaper. After Korea regained independence in 1945, he was elected as the first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helped enact of the constitution. At the time of the Korean War (1950-1953), he was abducted to North Korea where he later died.
The house consists of a women’s quarters, a men’s quarters, and a storehouse. The men’s quarters and the storehouse stand side by side, and the women’s quarters, which was built atop a stone embankment, is situated behind the men’s quarters. The women’s quarters consists of a kitchen on the far right, two underfloor-heated rooms with a wooden-floored hall in front of them in the center, and another room with a narrow wooden veranda on the far left. The men’s quarters consists of two underfloor-heated rooms with a narrow wooden-floored hall in front of them, and a wooden-floored porch. The back of the men’s quarters features a narrow wooden veranda.
In Deoksan-ri Village, there is a shrine called Deoksansa which commemorates figures of the Suwon Baek Clan. Behind the shrine is an empty tomb built in Baek Gwan-su’s honor.
영문 해설 내용
이 집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인 백관수(1889-1961)가 살았던 곳이다. 이 집이 있는 덕산리는 백관수가 속한 수원백씨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는 마을이다.
백관수는 이 마을 출신으로, 어릴 때 당시 저명한 유학자였던 전우(1841-1922)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915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유학 기간 중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였다. 1919년 학생대표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4년 귀국한 뒤에는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후 다양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참여하다가 1937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에는 초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고, 북한에서 사망하였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와 곳간채가 나란히 있고, 사랑채 뒤에는 석축 위에 지어진 안채가 있다. 안채는 오른쪽에서부터 부엌과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온돌방과 대청마루가 있고, 방의 앞뒤로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이 집이 위치한 덕산리에는 백관수를 비롯하여 수원백씨 문중의 인물들을 기리는 덕산사라는 사당이 있고, 사당 뒤편에는 백관수의 가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