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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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
Tomb and Stele of Yi Deok-hyeong
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
영문명칭 Tomb and Stele of Yi Deok-hyeong
한자 漢陰 李德馨 先生 墓 및 神道碑
주소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82번지
지정번호 경기도 기념물 제89호
지정일 1985년 9월 20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봉토묘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1기
웹사이트 한음 이덕형 선생 묘 및 신도비,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해설문

국문

조선 전기 문신인 한음 이덕형(1561~1613)의 묘이다. 부인인 한산 이씨와 함께 묻혀 있다. 무덤 앞에는 무덤의 주인을 표시하는 묘표가 서 있고,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시중을 드는 동자석이 있다.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예복을 입은(금관조복) 모습으로 신체 비례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으며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조선 선조 25년(1592) 일본군이 조선을 침입하자(임진왜란) 이덕형은 외교관으로서 일본 장수를 만나 일본의 잘못을 따져 물었다. 그리고 중국 명나라에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조선이 명나라 군사와 함께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이덕형은 조선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는 등 나라의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내쫓으려 할 때 이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용진(지금 양평군 양서면과 남양주시 조안면 잇는 자리)에 머물며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 300m 지점에 있다.

신도비

신도비는 한음 이덕형(1561~1613)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비석 받침은 네모나고 비석의 머릿돌은 용을 새겨 놓았다.(방부이수) 머릿돌의 용을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이덕형이 세상을 떠난 40년 후인 조선 효종 4년(1653)에 세웠다. 조경이 비문을 짓고 오시복이 글씨를 썼다.

조선 선조 25년(1592) 일본군이 조선을 침입하자(임진왜란) 이덕형은 외교관으로서 일본 장수를 만나 일본의 잘못을 따져 물었다. 그리고 중국 명나라에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조선이 명나라 군사와 함께 일본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전쟁 이후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노력하였다.

이덕형은 조선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내는 등 나라의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다.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내쫓으려 할 때 이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용진지금 양평군 양서면과 남양주시 조안면 잇는 자리에 머물며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이덕형의 묘는 신도비에서 약 300m 떨어진 산에 있다.

영문

Tomb and Stele of Yi Deok-hyeong

Tomb

This is the tomb of Yi Deok-hyeong (1561-1613),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and his wife Lady Yi.

Yi Deok-hy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0.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he was sent to Ming China with a request for reinforcements. As state councilor, he played a critical role during the war and in mitigating the social disorder following it. In 1608, the year when King Gwanghaegun (r. 1608-1623) ascended the throne, he became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position in the government. However, he opposed King Gwanghaegun’s attempt to expel his half-brother Prince Yeongchang and the prince’s mother Queen Dowager Inmok, and so he resigned from his official posts and stayed in Yongjin (present-day Yangsu-ri area), where he died from illness brought on by worrying about the country.

In front of the tomb mound is a tombstone, stone table, and stone incense table. To the left and right of the stone table is a pair of child attendant statues, which are believed to soothe the souls of the deceased and serve them. Other stone structures include a pair of stone pillars and a pair of stone statues of civil officials. The statues of civil officials are depicted wearing ceremonial attire and demonstrate advanced artistry, with perfectly balanced body proportions.

There is another tomb behind the tomb of Yi Deok-hyeong which belongs to his parents. At the entrance to the tomb area, there is a pavilion which houses a stele erected in 1653 to commemorate Yi’s life and achievements.

Stele

This stele was erected in 1653 to commemorate the life and achievements of Yi Deok-hyeong, a civil official of the Joseon period (1392-1910).

Yi Deok-hyeong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in 1580.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he was sent to Ming China with a request for reinforcements. As state councilor, he played a critical role during the war and in mitigating the social disorder following it. In 1608, the year when King Gwanghaegun (r. 1608-1623) ascended the throne, he became chief state councilor, the highest position in the government. However, he opposed King Gwanghaegun’s attempt to expel his half-brother Prince Yeongchang and the prince’s mother Queen Dowager Inmok, and so he resigned from his official posts and stayed in Yongjin (present-day Yangsu-ri area), where he died from illness brought on by worrying about the country.

The stele consists of a square pedestal, body stone, and capstone. The capstone features ornate and life-like carvings of dragons and clouds. The inscription on the stele was composed by civil official Jo Gyeong (1586-1669) and calligraphed by O Si-bok (1637-1716), a civil official and calligrapher.

To the east of the stele is a hall built in 1977 by Yi Deok-hyeong’s descendants to house his portrait.

영문 해설 내용

조선시대의 문신 이덕형(1561-1613)과 부인 이씨의 합장묘이다.

이덕형은 1580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전란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1608년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즉위한 해에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내쫓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용진(지금의 양수리 지역)에 머물며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봉분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다. 상석 양옆에는 동자상이 1쌍 있는데, 이러한 동자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시중을 드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의 석물로는 망주석 1쌍과 문인석 1쌍이 있다. 문인석은 예복을 입은 모습으로, 신체 비례가 균형을 잘 이루고 있고 뛰어난 솜씨로 조각되었다.

위쪽에 있는 무덤은 이덕형 부모님의 합장묘이다. 묘역 아래에 위치한 비각에는 이덕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53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

조선시대의 문신 이덕형(1561-1613)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53년에 세운 신도비이다.

이덕형은 1580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전란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1608년 광해군(재위 1608-1623)이 즉위한 해에 최고 관직인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내쫓으려 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용진(지금의 양수리 지역)에 머물며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

신도비는 네모난 받침 위에 비석을 세웠고, 머릿돌에는 용과 구름 문양을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놓았다. 비문은 문신 조경(1586-1669)이 지었으며, 글씨는 문신이자 서예가인 오시복(1637-1716)이 썼다.

신도비 동쪽에는 1977년 문중에서 이덕형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영정각이 있다.

참고자료

-> 묘역 위쪽 무덤(부모 합장묘)

->비석의 몸돌은 마모가 심한 상태로 글자가 거의 안보임. 비문 내용은 은행나무 앞에 별도로 세운 안내판(?)에서 확인할 수 있음.

  • 1984년 묘역을 정비했으며, 이때 봉분 주변에 두른 화강암 호석을 새로 둘렀다.
  • 부인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에서 왜군을 피하다 28살의 젊은 나이로 자결했다. 강원도에 모셨던 부인의 무덤을 왜란이 끝난 후 1603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