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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금산사 일원(용명당각민대사가람수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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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명당 각민대사 가람 수호기
대표명칭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 수호기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15길 1



해설문

기존 국문

용명당 각민대사는 1846년 8월 9일 전주에서 아버지 동래정씨 석로와 어머니 청송심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약관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 지진장로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조선말 국내외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였다. 대사는 금산사 주지로 재직하는 동안 안으로는 금산사의 가람수호를 위해서 그리고 밖으로는 호남 도승통을 이곳 금산사에 두어 호남지역 전체의 불교 발전을 도모하는 등 그의 열과 성의를 다하였다.

그 무렵 인근 지역에는 금광의 불법 채굴이 크게 유행하였다. 1900년(대한제국 광무 4년)에는 금산사 사리탑 아래까지 채광을 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사는 지방판서와 서울의 중앙내장원에 경내의 불법채광에 대한 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진정을 올리는 등 혼신의 노력으로 가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1901년(광무 5년) 12월 말에는 공식적으로 불법채광이 금지되었다. 채광꾼들은 불법채광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1902년(광무 6년) 1월 1일 금산사로 모여 크게 소란을 피우면서 채광을 계속하려고 하였다. 대사는 사내 대중승려들과 함께 이 소란과 채광을 막고 가람을 수호하려다가 채광꾼들의 손에 의하여 이 잣나무 아래에서 57세의 나이로 불의에 돌아가셨다.

용명대사의 이와같은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후세에 널리 전하여 가람수호 정신의 사표로 삼고자 여기에 삼가 작은 기록을 남긴다.

수정 국문

초고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전주 출신으로 20세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대사는 조선말 국내외의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금산사의 가람을 수호하는 데 힘쓰고 호남 지역 전체의 불교 발전을 도모하였다.

당시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 일대에는 금광이 있었고, 계곡에서 사금이 채굴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산을 파헤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00년에 들어서는 금산사 경내까지 채광꾼들이 나타났다. 채광꾼들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스님들은 지방 관아와 서울에 진정을 올려 사찰 내 불법 채광이 부당함을 알렸으며, 혼신의 노력 끝에 1901년 12월 말 불법채광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02년 새해 첫날 채광꾼들이 다시 금산사를 침범하였고, 주지인 각민대사는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온몸으로 채광꾼들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맞아 그대로 입적하고 말았다.

각민대사의 순교 후 대중들은 결사적으로 항거하며 가람을 수호하였고, 극렬한 저항에 채광꾼들도 물러서기 시작하여 마침내 다시는 단 한 명의 채광꾼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각민대사가 입적한 곳에 있던 잣나무는 100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다가 2007년 수명을 다했다.

자문의견

  1. 불교문화재 위원1
    • 명칭 부합, 객관적 ; 그러나 문장은 매끄럽게 다듬어져야 한다
    • 전문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예) 가부좌
    • 정확하다
    • 적절하다
  2. 불교문화재 위원2
    • 해당 항목은 각민스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지, 별도 유형의 설명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유물 해설로 접근하기 어려움. 항목 자체의 규정 고민 필요.

2차 수정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전주 출신으로 20세의 나이에 영주 정토사에서 출가하였다. 조선말 국내외의 사정이 매우 혼란할 때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였고, 호남지역의 교종·선종을 통솔하는 최고의 승직인 도승통을 이곳 금산사에 두어 금산사 가람을 수호하고 호남 지역 전체의 불교 발전을 도모하였다.

당시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 일대에는 금광이 있었고, 계곡에서 사금이 채굴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법으로 산을 파헤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00년에 들어서는 금산사 경내까지 채광꾼들이 나타났다. 채광꾼들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스님들은 지방 관아와 서울에 진정을 올려 사찰 내 불법 채광이 부당함을 알렸으며, 혼신의 노력 끝에 1901년 12월 말 불법채광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02년 새해 첫날 채광꾼들이 다시 금산사를 침범하였고, 주지인 각민대사는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온몸으로 채광꾼들을 막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맞아 입적하고 말았다.

각민대사의 순교 후 대중들은 결사적으로 항거하며 가람을 수호하였고, 극렬한 저항에 채광꾼들도 물러서기 시작하여 마침내 다시는 단 한 명의 채광꾼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각민대사가 입적한 곳에 있던 잣나무는 100년이 넘게 자리를 지키다가 2007년 수명을 다했다.

문맥요소

Nodes

Links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