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기본 정보
이름 | 5.18민주화운동 |
---|---|
한자명 | 五一八民主化運動 |
영문명 | 5.18 Democratic Movement |
이칭 | 광주민주화운동 |
발생시기(기간) | 1980년 5월 18일~27일 |
발생지역 | 광주광역시 |
주요 인물/단체/기관 | 전두환/신군부/계엄군 |
정의 및 개요
사건 전개
- 10.26사태 이후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는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과 정동년 등 광주지역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을 구속하였으며, 휴교령을 내리고 각 대학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 긴급 상황에서 휴교령이 내리면 교문 앞으로 모인다는 결의에 따라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모인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진입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계엄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광주역에 재집결해 시위를 계속하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다.
- 시위대가 늘어나자 계엄군으로 광주에 진주한 공수부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마구 구타하고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계엄군의 과잉무력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봉기했으며, 고등학생까지 가담해 시위는 더 격화되면서 시민봉기로 국면이 전환되었다.
- 20일 시위는 더욱 치열해졌다. 이날 오후 옛 전남도청이 있는 금남로 인근에는 20만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곳곳에서 계엄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7시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들이 대형버스를 몰고 계엄군을 압박했다. 광주역 인근에서는 차량을 앞세워 저지선을 돌파하려던 시민들을 향해 이날 밤 11시께 공수부대가 총격을 가하는 최초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광주역에서의 발포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 21일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은 군의 사과와 광주시민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오후 1시께 옛 전남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시민들이 애국가를 따라 부르며 1절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수백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계엄군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10여 분 동안 총탄을 마구 난사했다. 이어 계엄군은 옛 전남도청을 향해 나아가려는 청년들은 물론 주변 건물에 있던 사람들까지 조준사격을 가했다. 이날 계엄군의 발포로 최소 50여 명이 사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서는 무장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에 화순, 나주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무기를 탈취하고 광주로 반입하면서 시민들이 무장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시민군’이 등장했다.
-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시민군의 처절한 저항에 놀란 계엄군은 21일 오후 5시부터 8시 사이에 옛 전남도청 등에서 철수, 광주광역시 외곽지역으로 퇴각하였다.
- 22일 광주를 장악한 시민군은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시민들의 요구 사항을 알리고 공동체 구현 등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시민들은 빠르게 질서를 회복했고, 부상자들이 입원한 병원에는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경찰의 치안 활동이 없었음에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이나 귀금속점에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 수습 방법과 협상 내용과 방식, 무기 회수 등을 둘러쌓고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크게 엇갈렸다. 이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일부 학생과 시민은 25일 밤 새로운 지도부를 자처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옛 전남도청 사수에 나섰다.
- 27일 새벽 탱크 등으로 무장한 2만 5000여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진압을 펼쳐, 총격전 끝에 새벽 5시 20분께 옛 전남도청을 완전히 장악했다. 계엄군은 옛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 200여 명을 전원 연행하는 한편, 오전 가택 수색을 펼쳐 5.18시민수습대책위원회 참여자 등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다수를 군부대인 상무대로 연행했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옛 전남도청과 그 주위에서 사망한 17명을 포함 약 25명이다. 이들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특징
-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이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 및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후속조치 및 영향력
- 무장저항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저항을 행사한 사건으로 공식명칭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 아시아지역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이 인정되면서, 2011년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이 유네스코 인권분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이미지
참고자료
Contextual Relations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5.18민주화운동 | 5.18민주광장 | happenedAt | 주요 활동 장소 | |
5.18민주화운동 | 5.18사적지 | happenedAt | 주요 사건 발생지 | |
5.18민주화운동 | 상무대 | isRelatedTo | 군사재판 영창 소재지 | |
5.18민주화운동 | 안병하 | isRelatedTo | 당시 경찰국장 | |
5.18민주화운동 | 위르겐 힌츠페터 | isRelatedTo | 푸른눈의 목격자 | |
5.18민주화운동기록물 | 5.18민주화운동 | documents | 사건 관련 기록물 | |
5.18자유공원 | 5.18민주화운동 | commemorates | 추모공원 | |
국립5.18민주묘지 | 5.18민주화운동 | commemorates | 기념묘지 | |
아아_광주여!_우리나라의_십자가여! | 5.18민주화운동 | mentions | 최초 문학작품 | |
죽음을_넘어_시대의_어둠을_넘어 | 5.18민주화운동 | documents | 최초 발간 기록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