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수
기본 정보
| 이름 | 임형수 |
|---|---|
| 한자명 | 林亨秀 |
| 이칭 | 사수(士遂) |
| 생몰년도 | 1514년~1547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정의 및 개요
가계
- 본관은 평택(平澤)이고 자는 사수(士遂)이며 호는 금호(錦湖)이다.
- 북쪽 지방을 지키는 북병사 임준(林畯)과 현감 권석(權錫)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징
- 나주 송월동에서 태어난 임형수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성리학의 대가인 이황(李滉, 1501~1570)과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친하게 지내며 학문과 덕을 닦았다.
- 1531년(중종 25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35년(중종30년)에는 과거(문과) 시험에서 병과(3등급)로 급제했다. 이후 승정원 주서, 춘추관 기사관, 세자시강원 사서 같은 여러 관직을 지냈다.
-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수찬, 회령판관 등 내외직을 거쳐 홍문관부제학 자리까지 올라갔다.
- 하지만 1545년(인종1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정치적으로 밀려났고 제주목사(제주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제주목사로 일하며 공정하고 엄격하게 일 처리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 1546년(명종1년)에는 파면을 당했다. 1547년(명종2년)에는 권력을 잡은 소윤 윤원형 세력이 일으킨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류되어 대윤 윤임의 사람으로 몰렸고 외딴섬으로 유배되었다. 결국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 1567년 선주가 즉위년에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했다.
- 저서로는 『금호집(錦湖集)』상하 2권과『금호유고(錦湖遺稿)』가 있다.
- 평택임씨의 사우인 등림사에 제향하고 있다.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디지털제주문화대전 | 임형수 | https://jeju.grandculture.net/jeju/toc/GC00701699?search=D2/2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임형수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749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등림사 | https://gwangju.grandculture.net/gwangju/toc/GC60001436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임형수 | 등림사 | 임형수는 등림사에 제향되어 있다. | ||
| 임형수 | 김인후 | 임형수는 김인후와 친분 관계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