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
기본 정보
| 이름 | 박순 |
|---|---|
| 한자명 | 朴淳 |
| 이칭 | 화숙(和叔),사암(思菴),청하자(靑霞子),문충(文忠) |
| 생몰년도 | 1523년~1589년 |
| 성별 | 남성 |
| 국적 | 조선 |
| 출생지 | 나주 |
정의 및 개요
- 박순(朴淳, 1523~1589)은 나주 출신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특징
- 박순의 본관은 충주이다.
- 자는 화숙(和叔)이며 호는 사암(思菴), 청하자(靑霞子)이도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박순의 증조할아버지는 박소(朴蘇)이며 할아버지는 박지흥(朴智興)이고 아버지는 박우(朴祐)이다. 어머니는 해남김씨이며 아내는 고몽삼의 딸인 제주고씨이다.
- 박순의 할아버지인 박지흥은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일대에서 활동을 했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은 광주와 나주에서 세거하였다.
- 박순은 1540년 진사에 입격하였고 1553년 친시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거쳤다. 1561년 임백령(林百齡)의 시호 제정 문제로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나주로 돌아갔다. 1562년에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임명되었고 1563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그 뒤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1566년 부제학에 임명되고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1572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573년에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1579년에는 영의정에 임용되어 정승으로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옹호하다가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 박순은 사후 1643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1671년 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의미관계망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박순 | http://aks.ai/GC60001806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순 (朴淳)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0849 |
| 웹리소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월봉서원 (月峯書院)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987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박순 | 박지흥 | 박지흥은 박순의 할아버지다. | ||
| 박지흥 | 세하동 | 박지흥은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일대에 세거했다. | ||
| 박순 | 월봉서원 | 박순은 월봉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 ||
| 월봉서원 | 광산동 | 월봉서원은 광산동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