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당
기본 정보
| 이름 | 하모당 |
|---|---|
| 한자명 | 何暮堂 |
| 영문명 | Hamodang |
| 이칭 | 서석헌(瑞石軒) |
| 위도(latitude) | 35.1446366 |
| 경도(longitude) | 126.9194774 |
| 역사적 시기 | 조선시대 |
| 종류 | 문화재/건물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 38 |
정의 및 개요
- 광주읍성의 중심건물인 동헌으로 지금은 헐리고 없다.
- 5·18민주광장 상무관 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건물 형태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 목사의 집무실로 당시 지방관이 사법권까지 쥐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재판정 구실도 했던 곳이다.
특징
- 1872년 지방지도에는 남쪽의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동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회랑에 둘러싸여 있으며, 누각과 삼문 등 총 15채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 광주읍지(1879, 1924년)에는 읍성의 동헌인 하모당이 객사의 동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건물의 정확한 위치와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상방(上房)이 좌우 각 2칸씩 있었고 여기에 익랑(翼廊) 1칸, 협방(夾房) 1칸 등 모두 6칸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관련 행사 및 사건
- 하모당은 1896년 광주가 전라남도의 관찰부(훗날 도청으로 이름을 바꿈) 소재지가 되면서 관찰부의 부속건물로 사용됐다. 관찰부가 된 그해 9월 광주에 온 한 지방관의 견문 기록에 따르면, 하모당은 서석헌(瑞石軒)이란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宣化堂)과는 다른 건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 건물면적이 대략 50여 평 남짓했던 하모당은 1911년부터 상품진열소로 사용되다 1920년대 중반 헐린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정보
- 광주읍성의 동헌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헐고 낡아 광주목사 해봉 홍명원(1573~1623) 재임 시절인 1610년대에 다시 지어진다.
- 홍명원은 ‘하모당기’를 통해 동헌 이름을 하모당으로 지은 내력을 밝힌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뒤에 광주 읍내는 황폐해졌다. 전란의 영향으로 광주 관아 역시 건물이 헐고 비루해져 도저히 관아로 쓸 수가 없어 몇 년 동안 민가를 빌려 써야 할 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을의 면모를 생각해 ‘뒤늦게 지은 집’이란 뜻으로 하모당이라 지었다는 것이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 Type | Resource | Title/Index | URL |
|---|---|---|---|
| 웹리소스 | 광주드림 | 광주관아의 중심 건물(조광철 기고, 2022-11-21) | https://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620389 |
| 웹리소스 | 디지털광주문화대전 | 4대문-광주읍성 | https://gwangju.grandculture.net/gwangju/toc/GC60005060 |
| 웹리소스 | 광주서구문화원 홈페이지 | 하모당 | http://www.gjsgcc.or.kr/ko/26/view?SEQ=2687 |
| 웹리소스 | 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사이버 광주읍성 | 동헌 하모당 | http://gjstory.or.kr/sub.html?pid=129 |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하모당 | 광주읍성 | 하모당은 광주읍성의 동헌이다. | ||
| 하모당 | 홍명원 | 하모당은 광주목사 홍명원이 중건했다. | ||
| 하모당 | 하모당기 | 하모당은 하모당기에 명명 내력이 나온다. | ||
| 하모당 | 서석헌 | 하모당은 서석헌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 ||
| 하모당 | 상품진열소 | 하모당은 상품진열소로 사용되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