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릿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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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이름 | 너릿재 |
|---|---|
| 영문명 | Neoritjae |
| 이칭 | 널재 |
| 위도(latitude) | 35.0882598 |
| 경도(longitude) | 126.9523751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동구 선교동 너릿재 옛길 |
정의 및 개요
특징
- 오르고 내리는 길은 경사가 급하지만, 고갯마루는 널찍하고 평평해서 한자로는 조선 초기부터 '판치(板峙)'라고 표기했었다.
- 고개 바로 옆에 구 너릿재터널 (1971~)과 신 너릿재터널(2007~)이 개통된 후에는 차량 통행이 제한되어, 현재는 산책로로 사용되고 있다.
관련 행사 및 사건
- 옛날부터 도둑도 많고 비극적인 사고가 잦아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이름이었다. 언행이 고약한 사람에게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고 욕하기도 하였다.
- 1895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잡혀서 처형되었던 곳이라고 하며, 경술국치를 목전에 둔 1907년에는 양회일 의병장이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체포된 곳이다.
- 또한, 1946년 8월 15일 새벽 3시경, 광주로 향하던 화순 탄광 노동자들과 주민들이 미 군정의 비행기와 탱크의 공격에 학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광복 1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광주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완전독립'과 '쌀 배급 증량' 등을 외치던 중 공격을 받았다.
- 1950년 6.25전쟁 중에 북한군과 남한군이 대결하면서 서로 번갈아 가며 상대방 측이라 생각되는 민간인들을 죽인 곳도 너릿재였다.
- 5.18민주화운동(1980) 때도 비극은 너릿재를 비껴가지 않았다. 5월 23일 시내에서 후퇴하고 잠복해있던 공수부대가 너릿재를 지나던 버스에 총을 난사하여 승객 10여 명(혹자는 30여 명이라고 함)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 유일한 생존자는 여고생 1명(홍금숙)이었다.
-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고 그 죽은 자들의 관(널)들이 수없이 지났던 고개여서 널재(너릿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만들어질 정도였다.
- 현재는 가족들, 연인들로부터 사랑받는 아름다운 산책로이며 특히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 축제가 열리기도 하는 등 비극의 흔적은 단지 고개 이름에만 남아 있다.
관련 항목
의미관계망
지도
참고자료
Contextual Relations
| Source | Target | Relation | Attribute | Remark(Note) |
|---|---|---|---|---|
| 너릿재 | 화순읍 | 광주와 화순읍을 잇는 고개 | ||
| 너릿재 | 너릿재터널 | 고개 바로 옆에 만들어진 터널 | ||
| 너릿재 | 동학농민운동 | 농민군 포로들이 처형된 곳 | ||
| 너릿재 | 양회일 | 1907년에 너릿재에서 체포당한 의병장 | ||
| 너릿재 | 9.28서울수복 | 6.25전쟁 중 남,북한군의 대결로 주민들이 번갈아 학살당한 시기 | ||
| 너릿재 | 화순탄광노동자봉기 | 탄광 노동자들이 1946년에 미군정 경찰에게 희생당함. | ||
| 너릿재 | 5.18민주화운동 | 공수부대의 버스 공격이 있던 곳 | ||
| 너릿재 | 동국여지지 | 판치라는 이름이 기술된 지리서 | ||
| 너릿재 | 대동여지도 | 판치가 묘사된 지도 | ||
| 너릿재 | 해동지도 | 판치 표기된 지도(1750년대 초) | ||
| 너릿재 | 소아르갤러리 | 2012년 개관한 너릿재에 있는 미술관 겸 카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