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2024-C208
경의재가 된 소해정, 절의의 공간으로
이야기
노종룡(盧種龍)은 최익현과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유학자로,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며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린 인물이었다. 그러한 삶의 궤적은 그가 말년에 소해정이라 명명한 정자를 세우는 데에도 담겨 있다. 소해정은 1930년, 그가 광주 북구 일곡동에서 유락과 사색을 위해 세운 누정이었다. 그러나 이 공간은 단순한 휴식처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아들 노진영(盧軫永)은 1965년, 아버지의 뜻을 기리고자 소해정을 같은 경내에 있는 만주사(晩州祠)의 강당으로 헌납하였다. 이때 정자의 명칭은 ‘경의재’로 변경되었으며, ‘경의(景義)’란 이름에는 선친의 절의(節義)를 숭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변화는 소해정이 단순한 누정에서 후학을 위한 강학처이자 정신적 교육공간으로 전환되었음을 상징한다.
만주사는 노종룡과 그의 스승 송병선을 함께 모신 사우로, 절의를 숭상한 사림의 신념이 계승되는 곳이다. 또한 『소해유고』에는 그의 생애와 사상이 집약되어 있어, 그 정신적 유산을 오늘날까지 이어주는 기록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경의재는 이름만 바뀐 정자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혼란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한 유학자의 신념이 지역의 공간에 스며든 상징적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
스토리 그래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