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숙 구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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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숙 구명위원회는‘무등산 타잔 사건’으로 재판을 받던 박흥숙을 구명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
- 월간 대화 1977년 8월호에 무등산 타잔 사건에 대한 김현장의 현장 르포 기사가 나가자 이 글을 읽고 당시 광주 YWCA 이사 안성례(뒷날 광주광역의시회 부의장 역임.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해직된 전남대학교 명노근 교수의 부인)를 중심으로 서명 작업과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결성된 박흥숙 구명위원회에는 사회 지도층인 박순천, 김옥길, 오지호 등 63명의 인사가 참여하였다.
- 박흥숙 구명위원회는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사건이라기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추진해 왔던 고도 경제성장의 그늘 아래서 소외된 도시 하층민의 무주택 문제가 빚어낸 사건이자, 대책 없이 진행된 행정상의 횡포가 부른 참극이었다.”라고 규정하고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재판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 박흥숙 구명위원회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상고심 공판에서 사형 선고에 대한 원심을 확정하였고, 박흥숙은 광주교도소에서 1980년 12월 24일 형이 집행되어 삶을 마쳤다.
- 박흥숙 구명위원회는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구명 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당시 지식인들이 ‘무등산 타잔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를 말해 준다.
- 참조: http://gwangju.grandculture.net/gwangju/toc/GC60005068